맞들면 증식하는 것
내가 사는 동안 늘 우울증 환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붙들렸을 때 나의 역할을 고민하느라 허공만 노려보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치료를 받으면서 무엇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정해진 역할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의 주변에서 힘이 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이 완전히 들리지 않는 시기도 있다는 것도. 가장 힘든 사람은 환자 자신이라는 사실에는 일고의 여지도 없으나, 힘들어하는 사람의 옆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입장 또한 상당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의 우울증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집중하는 행위는 내 에너지가 닳아 결국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옆에서 먼 곳으로 나가떨어지는 시점만 앞당길 뿐이다. 환자와 환자 보호자 양측을 위해 관련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보호자 자신은 환자에게 있어 무척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보호자의 노력이 환자의 증상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환자가 인식하는 보호자의 존재감이나 중요도에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하다. 많은 문제들이, 잘못된 인과 사이에 연결선을 긋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악화된다. 보호자와 환자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 관계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환자의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보호자와 환자 양측에 이롭다. 보통 '나의 사랑이 너의 노로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맙소사, 아직도 설사를 하다니 내가 네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난 너를 사랑했는데'라는 생각은 하지 않잖는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의료 전문가의 조언과 전문가의 적절한 조치이다. 보호자의 역할이라면 환자 곁에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보호자 자신의 생활과 정신 건강을 돌보는 게 최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단 조바심을 내려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울증이 최소한 3개월에서 길게는 10년을 치료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차도를 보장할 수 없는 병인 만큼, 환자를 위한 본인의 헌신이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1. 환자와 보호자의 유대관계 그리고 2. 보호자의 헌신에 문제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신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보호자가 환자의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차도가 없는 것은 환자의 잘못도, 보호자의 잘못도 아니다. 자연현상처럼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비가 오는 게 내 탓이 아니고, 사자가 사슴을 뜯어먹는 게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듯이.
우울증에서 죄책감은 아주 흔한 증상 중 하나다. 죄책감이 환자와 보호자를 모두 좀먹을 것이다. 환자는 들인 노력에 비해 뚜렷한 차도가 없는 모든 과정이 죄스럽고 지칠 것이며, 가끔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스러워 미칠 지경일 수 있다. 보호자는 대체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환자의 죄책감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길 수 있다. 대게는 보호자 자신이 환자가 치료에 전념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환자가 죄책감을 느낀다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보호자 자신이 '지치거나 피곤한 티를' 냈기 때문에 환자가 '나 때문에' 눈치를 봐서 죄책감을 더 크게 느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길게 버티기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우울증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만 놓고 이야기했을 땐 이야기가 비교적 간단하지만 사실 인생은 훨씬 복잡하고 성인 우울증이라면 보호자와 환자 모두에게 생업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안 하는 게 좋은 말들이 몇 가지 있다. '부모님 생각은 안 해봤니?', '남겨질 사람들 생각은 해봤냐고?', '자살자 가족의 자살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봤니? 제발 다시 생각해' 등등... 그런데 나는 했다. 그 시절 나는 남은 평생 우울증에 붙들려 자살을 생각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무신경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내가 우울증에 걸리고 치료를 받으면서 비슷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업보의 존재를 조금 믿을락 말락 하는 상태가 되었지만 본투 무교인답게 이제는 안 믿는다. 이외에는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그 병이랑 싸워야지 평생 이러고 살 거야?' 등이 있었는데.. 상처가 되기에 앞서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에 담긴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느끼지 못하는 게 느낄 수 있는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단계였으니까.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더 기댈 수 있는 주변 사람이었을 텐데. 한창 아팠던 시기의 그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내가 그렇게 개떡 같은 전략을 취했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줘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죄책감이라면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의 죄책감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생겨난 죄책감으로 보기 힘든 것이다. 맞들수록 늘어난다. 모든 걸 함께하고 공유하는 것이 진정한 보호자의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