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먹고 싶은 날
“귤 먹고 싶다.”
아파트 단지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마트에 장보러 가는길에 과일집에 들러 귤을 구경해볼까 생각하다가 순간 ‘임신도 못했는데 귤은 무슨’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검열의 여유도 없이 마음에 즉각 올라온 내 생각이었다. 나부터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입맛이 뚝 떨어져 할 일만 하고 귤 구경가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몇 달전의 일이었다. 자연임신이 자꾸 실패로 돌아와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맛있는 집밥도 먹고 할머니 병원 면회도 갈겸 친정에 내려갔다.
내가 난임휴직을 하는 중이기도 하고 2인 가구라 과일을 종류별로 사놓고 먹는일이 거의 없었는데. 손만 뻗으면 집히는 과일들이 반가워서 밥을 헤치우고도 한참을 포도, 감, 귤 왔다갔다 하며 맛있게 먹었다. 특히 아기 주먹만한 귤이 너무 달고 맛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10개를 먹어버렸다. 엄마, 아빠와 함께 티브이를 보며 귤을 까먹고 있는데 함께 티브이를 보던 아빠가 갑자기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셨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아빠가 상자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들어오셨다. 현관을 들어서자 마자 박스를 뜯어 소쿠리에 와르르르 귤을 쏟아 나에게 내밀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귤을 입에 털어놓는 내 모습에 아빠와 엄마는 나의 임신을 확신하셨던 것이다. 내가 새로 온 귤을 우악스럽게 먹으며 “아니야. 내가 그랬으면 진작 말했지.”하니 “야가 이렇게 귤을 잘 묵었나? 긍께 니가 애기를 가졌는갑다 했다.” 하며 두분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아빠가 나를 위해 급하게 집을 나서 과일집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을 생각에 행복했다가, 친정에 와서 연속되는 임신 실패에도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던 내 마음에는 조그만 실금이 갔다.
아빠가 사오신 정성이 있으니 귤을 다시 10개는 더 먹은 것 같다. 입은 귤을 씹고 있지만 이전만큼 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연임신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고 난임병원에 다니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몸에 최대한 자극을 적게 주는 인공수정부터 시도해보고 3번 실패하게 되면 시험관 시술 단계로 넘어가자고 하셨다.
난임 시술을 막상 시작하니 시간이 빠르고도 느리게 지나갔다.
인공수정 1차, 2차를 실패하니 2개월이 성과없이 지나갔고 다시 인공수정 3차를 진행했다. 3차 이식 후 임신 여부를 기다리는 중 시댁에 내려갔다.
인공적으로 주입하는 임신 유지 호르몬탓인지 입맛이 항상 돌던 시기였다.
식사를 마치고 귤을 내오셔서 귤 여러개를 그 자리에서 까먹었다. 나중에 시어머니께서 남편과 통화하시며 그날 내가 귤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임신을 한 줄 아셨다고 했단다.
친정, 시댁에서의 귤맛이 이제는 달지 않을 것 같다. 임신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양가 어른들 앞에서 내가 귤먹는 일은 없을거라는 오기도 생겼다.
귤을 마구 먹어대던 그 인공수정 3차 기간도 실패도 종결되었다. 바로 지난 달의 일이다. 나는 이후 생리가 시작되자마자 시험관 시술 주기를 시작했다.
‘임신도 못하면서 무슨 귤’하고 입맛이 뚝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 나는 내 마음에 심각하고 큰 균열이 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차렸다. 큰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뭔가를 해야겠는데 떠오르는게 글쓰기밖에 없었다.
쓰는 일에 항상 빚만 져왔던 나는 매번 혼자 살아서 글감옥에서 도망쳤다. 그러고는 내가 언제 썼냐는 듯 혼자 버젓이 살아갔다. 이번도 저번처럼 나좀 도와달라며 글로 기어들어간다. 귤맛을 찾을 때까지 다시 써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