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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Mar 25. 2024

유산 경험, 단일한 상실

남들도 이런 경우 많다지만


“남들도 이런 경우가 많데. 우리 회사 OO 와이프도, OO 와이프도 말은 안 했지만 한 번씩 유산을 했다더라.”     

유산한 날 저녁 퇴근한 남편이 나를 위로해 주며 했던 말이다.      


일주일 전 남편은 임신 테스트기의 2줄을 보여주는 나에게 “아직 희미한 2줄인데 조금 지나서 더 진해지면 축하하자.”라고 말했다.      


평소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남편이라 막상 너무 기대한 뒤에 찾아올 실망이 무섭고 걱정돼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구나. 그의 방어기제가 이해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날은 뛸뜻이 기뻐할 줄 알았던 그의 반응이 막상 너무 떨떠름하자 임신 시도라는 것이 외로운 길이겠다 조금 실질적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무섭게 피와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여전히 이렇게 자신을 안전하게 방어하며 적당히만 나를 위로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도 나도 모두 서로가 원하는 모양과 방식의 위로를 건네주기엔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지만. 오늘은 그가 나와 함께 풀썩 주저앉아 엉엉 함께 울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응. 맞아. 내 친구들도 그런 경우 많다더라. 그냥 그렇다고. 몸이 평소 생리보다 훨씬 안 좋긴 하네.” 주저앉아 울 준비를 하던 나는 엉거주춤한 마음을 부여잡고 맹숭맹숭 털털한 척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날 토요일이 되었다. 그날도 여전히 몸은 만신창이였다. 아니 어제보다 훨씬 통증이 뾰족하고 무겁고 힘들었다. 두통까지 합세해서 내 몸을 짓눌렀다. 아끼는 동생의 결혼식도 못 가게 돼서 아침에도 조금 울었다.      


그날은 남편의 대학 동기 모임이 있는 날이라는 걸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서로 각자 결혼식, 동기 모임을 알아서 다녀오고 자유롭게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소파에 내내 누워 이불을 덮고 끙끙 앓으며 초점 없는 눈으로 티브이를 보던 나는 내심 그가 모임에 가는 걸 취소하고 나와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그는 몸 괜찮냐는 형식적인 질문을 하고 약속에 나갈 준비를 했다. 혼자 할 수 없는 임신인데 그 이후의 많은 것들은 여자 혼자 감당하게 된다는 현실이 가슴에 콕 박혔다. 이후 며칠을 외롭고 춥다는 생각만 하며 보냈던 것 같다. 어디에서도 제대로 엉엉 울지 못해서 목구멍이 아팠다.      

몇 주가 지났을 때 글쓰기 모임을 하는 친구들과 화상 채팅 모임이 있었다. 감정이 바닥을 파고들어 떠오르지 않아 괜히 어두운 모습만 보여주고 올까 봐 참석을 망설였는데. 친구들은 최근 내 일을 알고 있어 더 신경 쓰이게 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지만, 외로움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실함이 더 커서 모임에 참여했다.


모니터에 하나 둘 떠오르는 얼굴들을 보니 반가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친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이런 경우가 많이 있기도 하지만. 혜원에게는 이게 유일한 경험이잖아. 그래서 마음이 어땠는지 잘 지냈는지 궁금했어.”     


타인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경험이지만 나에게 있었던 ‘나의 경험’으로 최근 일이 다시 떠올랐다. ‘아기집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유산은 유산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냥 화학적 유산이라고 하죠’, ‘흘러내린다고도 해요’, ‘OO 와이프도 OO 와이프도 그랬데. 이거 다들 겪는 건가 봐.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우울해하고 있지만 말자.’ 지난 얼마간 인터넷에서 만난 글들, 들었던 이야기들이 와르르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 내가 겪은 일을 나만이 겪은 ‘단일한 상실’로 낯설게 봐주는 친구가 고맙고 안전하게 느껴져 몇 주간 쏟지 못한 말들과 눈물을 모니터 앞에서 펑펑 쏟았다.      


확실히 슬퍼서 안전해졌다고 느꼈다. 내 감정을 바라볼 자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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