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말고 감독이에요!

나도 치마 입고 출근하고 싶다 (공대여자 말고 그냥 나)

by mamang
출처 : unsplash(by Nassim Handstied)


공대여자 : 나는 취업하면 드레스 입고 회사 다닐 줄 알았잖아.
친구 : 입고 다니면 되지 왜?
공대여자 : 안돼. 무시당해.


사회생활 10년 차인 지금까지 회사에 치마를 입고 출근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첫 출근날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차려입었던 치마 정장을 포함해 치마 입고한 출근이 5번도 안 되는 걸 보면 직장 동료들은 나를 그냥 '치마 입기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예쁜 옷들, 액세서리들을 너무 좋아했다. 시력 교정술을 하며 안경을 벗게 되면서부터는 내가 여자라는 게 더욱 좋아졌다.


그래서 '취업을 하면 드라마에 나오는 커리어우먼처럼 자클한 치마 정장도 차려입고 멋진 회사 생활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원하는 부서에 지원서를 작성할 때에도 1순위, 2순위로 사무실 근무를 주로 하는 본사와 본부로 지망했으며 그곳에서는 마음껏 오피스룩을 뽐낼 수 있겠다며 홀로 김칫국을 마셨다.


설마 여긴 안 보내겠지 하며 빈칸을 채우는 느낌으로다가 시골의 한 현장을 3지망으로 지원했는데, 하필 내가 그곳 '진짜 현장'으로 발령받게 된 것이다.




치마 입기를 좋아해서 할머니 몰래 짧은 치마를 학교에 가져가서 몰래 갈아입기도 했고, 회사 입사 교육 때는 투피스며 원피스며 치마를 참 좋아한다고 동기 언니들이 '공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랬던 나는, 예쁜 치마 정장이 로망이었던 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로 회사에서 치마 입기를 포기했다.


01. 민망하다


첫 출근날, 차장님은 부서장인 미스터 우와 인사를 시켜주신 후 사수님을 불러 함께 현장을 돌아보자고 하셨다.


안전모를 쓰고 처음 현장에 나갔던 그 날이 지금도 생각나는데, 당시의 나는 취업 준비 기간 내내 독서실에만 있어서 햇빛을 보지도 못해 얼굴은 하얗고 젖살도 빠지지 않은 상태라 오동통한 얼굴이었다.


현장 소장의 안내를 따라 선배님들과 함께 현장에 들어서니 작업을 하시던 인부분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셨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 눈을 모로 뜬 채 못마땅해하는 듯한 사람들로 가득 찬듯한 그곳에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고개만 바닥으로 떨구고 현장을 슬쩍슬쩍 훑어보며 다녔다.


현장에 나가서 그 시선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업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작도 전에 숨이 턱 막히고 답답해서 앞으로 이곳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물론 동시에 '아. 자클한 치마 정장은 영영 못 입어 보겠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 감독이라는 것 자체로도 시선을 끌 만하던 그때 치마를 고집할 용기가 없었다.




02. 불편하다


첫 발령지였던 현장은 아주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라 하루 3~4번은 기본적으로 현장에 나가야 했다.


사수님과 함께 현장 확인 및 검측을 하러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의 검측 대상은 수문을 설치하기 위해 수문을 지지해주는 구조체였다. 콘크리트 타설 시 구조물의 모양을 잡아주기 위해 설치하는 거푸집(형틀과 같은 역할을 함)은 콘크리트의 무게와 타설 시 발생하는 압력을 잘 지지해주게 안전을 고려하여 설치되어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었다.


눈앞에서 보니 6m 거푸집은 생각보다 정말 높았다. 사수님은 그 거푸집을 기어 올라갔다가 반대편으로 다시 내려가 구조물 내부의 철근 배근 적정성 등 품질 확보 및 안전을 위한 사항들을 확인하셔야 했다.

사수님 : 내가 올라갔다 올 테니 공대여자는 여기에서 잠깐 기다려.
공대여자 :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수님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6m 높이의 구조물을 기어 올라올 거로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막내 감독이었기 때문에 매번 사수님과 함께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현장에서 사수님이 어떻게 대응하시는지도 다 보고 싶었기 때문에 무서웠지만 일단 뒤따라 기어 올라갔다.


바지를 입고 현장에 따라 나와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만일 치마를 입고 나왔다면 사수님을 따라 올라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아주 난감할 뻔했다.

사수님 : 응? 왜 따라 들어온 거야? 어떻게 왔어?
공대여자 : 그냥 사수님처럼 기어 올라왔어요.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울렁증도 심해서 바이킹도 난도가 가장 낮은 가운데 자리에 타고 바들바들하며 "어서 내려주세요" 하고 외친다. 그리고 평소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내가 떨어져 버릴 것 같아서 주저앉아버린다.


사수님을 따라 6m를 기어 올라간 그 날도 자꾸만 발을 잘못 디뎌서 모양새 빠지게 저 밑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겨드랑이에 땀이 차올랐다. (모양새 빠지기 전에 내 발목이 먼저 빠지겠지만)


그런데도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나한테 일을 맡기겠나 싶고, 그렇게 되면 영원히 '애물단지 여직원'이 되어버릴 것 같은 생각에 울상이 되어 별수 없이 올라가게 되었다.


내가 현장에서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 울상이 되었고, 게다가 새로 사서 처음 입고 간 예쁜 기지 바지(정장 바지)가 거푸집 고정 장치에 걸려 찢어져 버린 바람에 완전 울상이 되어버렸다.


작업 추진과 더불어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구조물 탓에 나중에는 10m가 넘는 가시설 위를 지나다녀야 했고, 현장에만 나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치마를 입고 가시설을 넘어 다니게 되면 안이 훤히 보이게 되니 치마는 자연스레 나에게 입을 수 없는 옷이 되었다.




03. 정말로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공사 현장에서의 업무를 익히다가 나중에는 나의 여성성을 숨기는 게 업무 협의에 조금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루는 현장에 검측을 나가서 시공사에 재시공을 지시한 날이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장 인부 한 분이 갑자기 들고 있던 삽을 내 앞에 집어 던지며 쌍욕을 마구 해댔다. 나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너무 놀라서 눈만 끔뻑끔뻑 거리고 있는데, "그렇게 잘 알면 네가 와서 해보라"며 소리를 질렀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걸 알면 제가 직접 했겠죠.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선생님.'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조용히 있던 시공사 직원이 나중에서야 현장 인부를 말리면서 상황이 종결되는 듯했다.


물론 그날 나는 다른 업무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쫄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람보다 힘도 세지 않고 가진 거라곤 '감독'이라는 직함 하나일 뿐인데 내가 무슨 수로 그 사람을 진정시키고 이성적인 협의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내가 무력하게만 느껴졌고, 나중에는 한심하게만 생각되어서 운전하며 퇴근을 하는 내내 질질 울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나에게 삽을 던졌던 그분의 동료로 추정되는 분이 나를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불렀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그렇지. 내가 아가씨는 맞긴 하지? 그렇다고 학생은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기도 했다. 여기에 아가씨는 나뿐이니까.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 남자 감독이었어도 "아저씨~ 아저씨~" 하고 불렀을까? 싶은 생각에 울화가 치밀었고, 얼마 안 있어서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 현장에서 근무하는 내내 질질 울면서 퇴근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눈을 크게 뜨고(사실 미간이나 인중 어디인가를 응시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분이 들고 있는 공구가 두렵지 않은 척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공대여자 : 아가씨요? 저 부르신 거예요? 선생님 여기에 아가씨가 어디에 있나요?
반장님 :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분은 나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황하더니 말끝을 흐리고 본인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강하게 나가면 괜찮을 것 같았던 그 날, 사무실에 돌아와서는 내리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감독님 콘셉트는 잘 잡으신 것 같네요" 8년 차쯤, 한 현장 소장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매사에 툴툴거리며 내뱉듯이 이야기하고, 현장 직원들과 말을 많이 섞지 않으려고 하니 이를 '시크하고 무서운 감독 콘셉트'라고 하며 공사를 마무리하고 나가면서 했던 말이다. "그러게요. 싸가지 없이 구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해요. 뒤돌면 엄청나게 욕먹겠지만요."하고 웃으며 말했다.


15개가 넘는 공사를 준공시킨 지금 돌이켜보면 나만 '여자'라는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에 갇혀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안전, 품질, 돈이 걸려있는 공사 현장이다 보니 다소 과격해질 수도 있고 예민해질 수 있는 직무인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만의 판단 기준과 다양한 시공 경험이 경력이 되어 쌓인 지금, 내가 신입 이후 겪어왔던 일들은 경력이 길지 않은 직장인이면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조금씩이나마 알게 되는 것 같다.


팀장님 : 여기 바닥에 흙 뭐야? 누가 현장에서 발을 안 털고 온 거야?
공대여자 : 팀장님 그냥 콩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흙을 털고 온다고 털었는데 죄송합니다. 허허.


그렇게 나는 요즘도 회사 내 자리에 콩코물을 흘리며 털털하게 현장을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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