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 난 손녀와 간호하는 할머니

할머니 나 아이스크림이면 돼(공대 여자 말고 그냥 나)

by mamang


의사 선생님 : 안녕하세요. 할머니.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할머니 : 아이고 선생님. 제가 아니고 여기 제 손녀가 술병에 걸려서 데꼬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 : 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회식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30살이 되는 해에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우리 할머니는 술병이 잘 나는 막내 손녀를 끌고 종종 동네 내과에 방문했다.

공대여자 : 아니. 할머니 나는 스크류바 하나면 된다니까.
할머니 : 뭔 소리여. 아침에 쓸개즙까지 다 토해놓고. 링거 하나라도 맞아야지 안 그르믄 죽어야.
공대여자 : 안 죽는다고 할머니. 아 나 창피하다고.


그날도 밤새 토사곽란에 시달린 손녀를 보다 못한 할머니는 가지 않겠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병원에 갔다. 할머니가 아파서 오신 줄 알았던 의사 선생님은 나를 아주 한심하게 쳐다보셨던 것 같다.




할머니가 내 숙취를 위해 애써주셨던 걸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실 나의 음주 역사는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왔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언니 둘은 술을 마시면 징계를 받는 신학대학을 다녔고, 9살 어린 늦둥이 남동생은 당시 아직 콜라만 마실 나이였기 때문에 나는 혼자만의 싸움을 해나갔다. 다른 친구들이 아무 문제없이 자유로운 망아지처럼 놀러 다니는 게 부러웠다. 나는 자유로운 음주 문화를 인정해주라고 외로운 투쟁을 반복했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나의 음주 활동에 당혹스러워했다. 단골 멘트로는 "너희 언니들 학교 다닐 때는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러냐"가 있었다.


물론 나는 항상 속으로는 '기대하세요. 남동생이 남아있잖아요.' 하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깊이 반성하는 척했다.


보수적이었던 아빠 때문에 큰언니는 대학 다닐 때 염색도 파마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언니들은 대학을 서울로 보냈지만, 언니들의 자췻집에 전화기를 두고 불시에 전화해서 감독했다고 들었다. 그나마 떨어져 있어도 안심이 되었던 건 신학대학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음주는 멀었기 때문이리라.


막내딸이 공대에 들어간 후 엄마는 엄마대로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나를 단속했다. 아빠는 의외로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아마 본인도 한참 본인은 술을 마시고도 돈을 정확하게 세었다느니 식당 단골을 만드느라 하루도 술을 안 마신 날이 없었다느니 하는 무용담을 나에게 많이 털어놨기 때문이 아닐까. 다만 가장 무서웠던 건 어쩌다 한 번씩 "적당히 해라."하고 말씀하실 때였다.


엄마는 11시까지 집에 들어오라고 통금을 정해서 나를 감시했다. 나는 어쨌든 술을 마시든 안 마시든 11시에만 집에 들어가는 걸로 대응했다. 통금이 정해져 있다고 친구들과의 친목 도모와 선배들과의 소통의 장에 빠질 수가 없었기에 지인들의 양해를 구해 오후 5시가 되기도 전에 학교 앞 소금 구이집이 문을 열자마자 개시 손님이 되었다.


한 번은 집에서 하도 성화여서 일단 귀가를 한 후 새벽에 나오겠다고 동아리 선배에게 약속하고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정말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약속대로 4차를 진행 중인 감자탕집에 갔고 얼큰하게 취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도 먹지 않은 감자탕을 나 홀로 야무지게 뜯어먹기도 했다.


어쨌든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면서 조금씩 통금시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고 점차 통금의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점차 놀 자유를 획득했다.


자유는 투쟁하는 것,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30살 공대 여자 : 내가 말이야 이놈아 이 집에서 꿋꿋하게 공대생 라이프를 유지하고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모르느냐. 나는 말이야 눈치 보이면서도 굽히질 않았어 인마. 너의 지금 그 자유로운 캠퍼스 라이프는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인마.
남동생 : 진짜 인정. 누나 덕분임.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리게 된 남동생에게 나는 일장 연설을 하며 나의 공을 알아주라고 했다. 내가 이 집에서 놀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라며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를 읊조렸다.




눈치 보이는 나의 음주 생활은 월급을 받으면서 조금이나마 당당해졌다.


"엄마,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야." "할머니,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데 어찌 제가 먼저 일어나버리겠습니까."하고 나중에는 "나도 정말 회식 싫어. 그런데 어쩌겠어요?"하고 당당하게 굴었다.


언제 한 번은 현장에서 수도관이 파손되어 긴급복구 때문에 현장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밤새 긴급복구 현장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처리하다가 새벽 2시가 되었다.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다시 현장에 나가야 해서 급하게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그때 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방에서 나온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 : 어디로 누구 만나러 가냐!
공대여자 : 아니야 할머니 회식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간다고.


할머니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화장실에 들어가 버렸다. 애초에 내 말은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새벽 2시에 나가는 손녀에게 걱정이라도 한마디 해주지. 다시 생각해보니 그래 내가 평소에 잘했어야 나를 믿어줄 텐데.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3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엄마는 내가 회식만 다녀오면 항상 이렇게 말했다.

엄마 : 아야. 우리 식당으로 회식하러 오는 다른 아가씨들은 상 밑에 술만 잘도 버리더구먼. 너는 왜 그렇게 안 하고 주는 대로 다 먹고 오는 거냐 도대체.
공대여자 : 엄마. 나 토목인 이야. 이 세계는 냉정하다고. 술 버리는지 아닌지 다 알아.


엄마는 남들 다 하는 직장생활을 참 요란하게도 한다고 나를 나무랐다.


엄마가 말해주기를 상 밑에 밥그릇을 두고 소주를 버리는 경우, 물 잔을 두고 술을 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도 아니면 손을 닦는 물수건을 치우면서 만져보면 뭔지 모르게 상당히 축축할 때도 있는데 백이면 백 코에 가져다 대면 술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건 토목인의 세계에서는 아주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자발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렸던 대학 생활을 지나, 비자발적으로 어울려야 했던 회식에 대한 나의 속사정은 조금 달랐다.


안주라도 충분히 먹어야 속이 덜 상한다는데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일단 술부터 말아보자고 하는 상사들에게 대꾸할 수도 없었고 어느새 맥주병은 뽕뽕 따고 있었다.


무엇보다 토목을 전공했다고 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술 잘 마시겠네." 였는데,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하기에는 상대방이 눈을 너무 반짝이며 나를 반기는 표정이라 그들을 실망하게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대답은 회피하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입꼬리만 올리며 웃는 모양을 취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남자라고 술을 다 잘 마시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다 못 마시는 것도 아닌데 괜히 회식만 가면 다른 남자 동료들과 비교당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오버페이스하게 되는 것 같다. 2년에 한 번 근무지를 바꿔야 하는 순환근무를 해야 하기에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인척 하고 싶었던 것도 같고, 또 여직원을 원하지 않는 선배들의 인식도 바꿔놓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자리는 남자들이 주를 이루는 사회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친목 도모의 장이었다. 술에 취하면 한 번씩 자기들끼리 "형님 ~ 형님 ~" 하고 부를 때도 있는데 그게 진심으로 참 부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오빠 ~ 오빠 ~" 하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끼워줬으면 했고 나도 그들과 대화가 잘 통했으면 했다.


그리고 회식을 마치고 다음 날 "속 괜찮냐?"라고 서로 물어보는 틈에 나도 끼어보게 되었을 때는 그들 사이에 나도 슬쩍 포함된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그때의 나는 항상 그렇게 조급증이 났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다음날 늦지 않게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어야지. 선배들이 호프라도 한잔하자고 할라치면 후배와 함께 적당한 크기의 장소도 빨리 섭외해야지. 저기 선배님이 혼자 계시니 가서 말동무를 해드려야지. 팀장님 택시도 잡아드려야지. 하고 마음이 바빴다.


모든 사람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고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들이 말하는 '적당히 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은 나에게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10년 동안 낑낑대다가 지금이 되고 나서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려고 억지를 쓰면서 매달렸던 그때의 내가 퍽 짠하다.


그 안에 푹 빠져있을 때는 몰랐는데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는 지금은 내가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도 내가 없는 그들만의 세계는 있고 내가 파고들어 갈 수 없는 더 좁은 틈이 내 앞에 놓여있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아무리 움켜쥐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대부분의 노력은 흘러가 버리고 손안에 남은 건 몇몇 인연뿐인 걸 몰랐다. 그렇게 빠져나갈 인연들은 애초에 내가 애를 쓰든 쓰지 않든 내 옆에 남아있어 줄 사람들이었을 텐데. 불특정 다수에게 잘 보이려 애쓰느라 내 가족들이 너무 고생하고 걱정했을 생각을 하니 오늘도 속이 상한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내가 너 시집가는 거는 보고 죽어야 하는데." 했던 나의 할머니는 내가 결혼을 하니 "어서 증손주를 낳아라"며 성화다.

"할머니는 왜 맨날 나만 보면 잔소리야. 하나 해결하면 또 다른 거 하라고 자꾸 그러는데!"하고 볼멘소리를 해대지만, 마음속으로는 조금 더 오래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크다.


나는 퇴사와 이직을 겪느라 할머니 곁을 떠나왔고, 이런저런 시간이 지나간 후 최근 결혼을 했다. 바깥의 평판에 귀 기울이느라 할머니와 더 많이 보냈어야 하는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어찌어찌 집을 떠나와 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할머니의 잔소리로 평범한 아침을 맞이하고 할머니가 툴툴대며 끓여주는 해장국을 먹고 선풍기 앞에서 스크류바를 빨며 티브이 보는 일상이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나는 영영 집을 떠났다.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늦잠 자는 나를 깨울 필요가 없었다. 나도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한때 아버지와 나는 하루도 떨어져 지내지 않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1년에 만나는 횟수가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됐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그게 자유라고 생각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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