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운전면허를 딴지 10년이 다 돼가는 나는 최근 운전면허를 갱신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지금은 능숙하게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고 하루살이나 새똥의 공격에도 더 이상 셀프 세차를 하지 않는 나의 첫 운전은 어땠을까 괜히 궁금해졌다.
#1. 출근 좀 시켜주시겠어요?
9년 전, 최종 면접 결과를 기다리며 "첩첩산중이나 바닷가에 있는 현장도 괜찮으니 제발 합격만 시켜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다. 나의 기도빨 덕분인지 정말 '차가 없으면 출퇴근이 불가능한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공대여자 :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수님 : 응 그래. 나도 잘 부탁해요. 운전은 할 수 있겠지?
정말 뭐든지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있는데 무면허 운전은 도무지 자신이 없고 할 줄도 모르니 합죽이가 되어 머리만 조아릴 뿐이었다. 풀 죽은 병아리처럼 기죽어 있는 게 재미있으셨는지 내 사수를 맡으셨던 변 과장님은 자꾸 "앞으로 신입사원 뽑을 때 운전면허증도 토목기사 자격증처럼 필수 항목으로 넣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하고 내 앞에서 차장님께 이야기하곤 하셨다.
그도 그럴 게 안 그래도 도심에서 꽤 떨어져 있어 출퇴근도 쉽지 않고 일손도 부족한 공사 현장에 어서 당장 한 명이라도 보내주라고 요청을 해놨더니, 당장 운전도 할 줄 몰라서 사수가 신입을 모시고 다녀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나라면 후배에게 훨씬 매운맛의 한두 마디를 보탰을 것 같다.
정말 다행히도 그 현장에 친하게 지내던 오라버니가 1년 선배로 근무하고 계셨다. 이 회사 공채에 낙방했을 때 면접 스터디를 같이 해서 친분이 두터워졌던 분이었다. 내가 잔뜩 주눅이 들어 면허도 없고 차도 없는데 어찌하여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다 하니 기꺼이 출퇴근을 같이하자며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셨다.
나는 정작 취업하고 나니 혼자서 출퇴근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려 몹시도 민망했다.
#2. 저 좀 데리러 와 주시겠어요?
당시 발령받았던 현장은 대형 토목 공사 현장이었다. 출근만 불편할 줄 알았던 처음과는 달리, 현장에 수시로 다녀야 하는 일도 무척이나 불편했다.
근무지 발령을 받고 몇 주의 시간이 지난 후 공사 일정이 점점 더 다급해지자 선배님들은 각자의 격무로 바빠지기 시작하셨다. 직접 감리* 현장인지라 선배님들께서 현장 확인이 어려운 부분은 나에게 일임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운전을 못 했던 나는 "선배님, 그렇다면 저 좀 현장에 데려다주시겠습니다?" 하고 묻지도 못했던 형편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검측*을 요청한 시공사의 공사 대리에게 전화했다. "대리님 죄송하지만, 저 좀 데리고 가주실 수 있나요?"
* 직접 감리 : 발주자가 현장을 자체 감리하는 것
* 검측 : 공사 세부 공정종류에 대하여 자세하게 검사하고 측량하는 것. 공정 진행 시 감리원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필수 절차임.
나는 현장에서 시공 불량 부분에 대해 지적도 해야 하고 재시공 지시(속어로 대나오시라고도 한다)도 즉각 내려야 했는다. 당연하게도 지시하는 감독과 지시를 받는 현장 직원들 간에 잦은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차를 얻어 타고 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민망하고 어색할 따름이었다.
방금 전까지 싫은 소리를 마구 하던 내가 돌아서서 "대리님. 그건 그렇고 저 좀 다시 사무실로 데려다주실 수 있을지요...." 하고 요청해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는지 모르겟다.
하루빨리 면허를 따서 사륜구동 SUV를 타고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현장에 나타나서 터프하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 다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멋쟁이 감독이 되고 싶었다.
공대여자 : 선배 저 운전 좀 알려주세요.
김 대리님 : 왜? 곧 면허 나오지 않아?
공대여자 : 아직 좀 더 학원에 다녀야 할 것 같아요. 현장 갈 때 너무 번거로워요.
김 대리님 : 응응! 알겠어!
그렇게 선배에게 시동 거는 법, 기어 바꾸는 법을 다시 배워서 사수님과 차장님 몰래 차를 타고 현장에 다녔다.
당시 공사 차량은 K 사의 모하비라는 사륜구동 SUV였는데 내가 차에 타 있는 걸 다른 운전자들이 볼 수는 있나 싶을 정도로 큰 소파에 파묻혀 있는 것처럼 운전석에 앉아서 운전했던 것 같았다. 차의 크기와 높이 탓에 운전을 할 때면 있던 목 없던 목 잔뜩 앞으로 뽑아가며 겨우 차를 몰았다.
나중에는 무면허로 현장을 다니다가 차장님, 사수님께 걸려버렸는데, 그때부터 내가 면허를 따기 전까지 차장님과 사수님은 현장에 순찰하러 온 경찰차가 보이면 "공대여자야 저기 너 잡으러 왔다." 하고 놀리셨다. 그때는 정말 나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잔뜩 주눅 들고는 했다.
아무튼, 결국 나는 휴일을 반납해가며 운전 학원에 다닌 지 3개월이 지나서야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천만 원이라는 큰 빚을 내서 중고자동차도 사고 출퇴근도 현장에 가는 것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3. 운전 병아리를 키워준 사람들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선배님들은 나의 운전 실력 향상을 위해 물심양면 노력해 주셨다.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에 주 차장님, 변 과장님, 김 대리님이 자동차에 꽉 들어차서 핸들은 겸손한 자세로 양손을 이용해 이렇게 돌려라, 브레이크는 살짝 지르밟아라, 깜빡이는 쓰라고 있는 거 다 등등 돌아가며 조언을 해주셨다.
한 번은 자동차 옆, 뒷자리까지 선배들을 꽉꽉 채우고 현장을 돌며 운전 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직진만 했던 나는 좌회전을 해야 하는 급커브길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 길이 있다가도 없어지는 토목 현장이라 그런지 그날도 처음 보는 좌회전 커브 길이 하천 앞에 만들어져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직선을 달리던 속도 그래도 붕 달리며 급하게 핸들만 돌렸다. 긴박하게 "속도 속도 속도 줄이고! 줄여! 줄여!" 하고 소리를 질러대셨던 주 차장님과 변 과장님은 차에서 내리시며 "앞으로는 네가 모는 차는 타지 않겠다. 우리는 가족이 있는 몸이라 양해 부탁한다"라며 정색을 하시기도 하셨다.
당시 현장이 시골에 있기도 했고, 선배들이 모두 정이 많아서 부서의 막내가 운전을 배울라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한 마디씩 보탰던 것 같다. 본인의 운전 노하우를 하나씩이라도 전수해 주려고 너도나도 앞장서서 훈수를 두신다. 운전은 미숙하나 갸륵했던 막내는 선배님들의 조언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받아먹었다.
#4. 나의 첫 고속도로 주행
나와 내 차가 국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그 무렵 회사 선배 한 분이 상을 당하셨다. 장례식장이 부산이라서 차장님 2분, 과장님 한 분, 그리고 26살 나와 23살 슬이가 함께 했다. 차장님의 차에 탄 우리는 함께 부산으로 출동했다.
부산 장례식장에 도착한 후 타고 온 차의 주인이신 차장님을 포함한 세분의 선배님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소주와 맥주를 들이켜시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호남까지 다시 내려가려면 술을 먹고 잠들어버려야 시간이 금방 간다고 하셨다. 면허를 취득한 지 이제 막 두 달 때쯤이 되어가던 나와, 면허가 있지만, 운전을 거의 해본 적이 없던 슬이는 서로 눈알만 굴리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슬아 우리 집에 갈 수 있을까?"
조문을 마친 후 차의 주인인 차장님께서 나에게 자동차 키를 건네주시면서 "공대여자 이제 운전할 수 있잖아. 집까지 잘 부탁해." 하셨다. 내가 "네? 차장님 저 고속도로 한 번도 안 타봤는데요?" 해도 이미 고주망태가 되신 세분의 선배님들은 술기운 때문에 겁이 상실된 것인지 무뎌진 것인지 신속하게 차 뒷자리에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잠들 준비를 마쳤다.
어찌 되었든 집에는 가야 하므로 나는 울상인 얼굴을 하고 운전석에, 슬이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 보조석에 앉았다. 운전 병아리인 나는 옆자리의 슬이에게 의지하며 4시간여를 내리 달려야 했다. "슬아, 졸려? 자면 안 돼. 나 혼자 두면 안 돼? 슬아 나 잘 가고 있는 거지? 나 집에 가고 싶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중간중간 팔걸이에 다리를 올리는 차장님의 방해만 없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겠지만, 어땠든 우리는 회사 근처인 전남의 한 읍내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건 극한의 상태에서 고속도로 운전을 경험한 이후 도로 위의 다른 차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양손 걷어붙이고 시간을 쪼개서 본인의 안전을 담보로 후배에게 운전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그때 선배들은 나를 왜 그렇게 도와주고 싶어 했을까.
내일은 주 차장님 변 과장님, 그리고 김 대리 오라버니에게 안부 연락을 해야겠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그때 저한테 운전 알려주시다가 죽을뻔했던 거 생각나시냐고. 안부를 묻고 싶은 회사 선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마음이 든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