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나 아이스크림이면 돼(공대 여자 말고 그냥 나)
의사 선생님 : 안녕하세요. 할머니.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할머니 : 아이고 선생님. 제가 아니고 여기 제 손녀가 술병에 걸려서 데꼬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 : 네?
공대여자 : 아니. 할머니 나는 스크류바 하나면 된다니까.
할머니 : 뭔 소리여. 아침에 쓸개즙까지 다 토해놓고. 링거 하나라도 맞아야지 안 그르믄 죽어야.
공대여자 : 안 죽는다고 할머니. 아 나 창피하다고.
30살 공대 여자 : 내가 말이야 이놈아 이 집에서 꿋꿋하게 공대생 라이프를 유지하고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모르느냐. 나는 말이야 눈치 보이면서도 굽히질 않았어 인마. 너의 지금 그 자유로운 캠퍼스 라이프는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인마.
남동생 : 진짜 인정. 누나 덕분임.
할머니 : 어디로 누구 만나러 가냐!
공대여자 : 아니야 할머니 회식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간다고.
엄마 : 아야. 우리 식당으로 회식하러 오는 다른 아가씨들은 상 밑에 술만 잘도 버리더구먼. 너는 왜 그렇게 안 하고 주는 대로 다 먹고 오는 거냐 도대체.
공대여자 : 엄마. 나 토목인 이야. 이 세계는 냉정하다고. 술 버리는지 아닌지 다 알아.
나는 영영 집을 떠났다.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늦잠 자는 나를 깨울 필요가 없었다. 나도 더 이상 아버지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한때 아버지와 나는 하루도 떨어져 지내지 않는 사이였지만, 이제는 1년에 만나는 횟수가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됐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그게 자유라고 생각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