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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May 19. 2021

파랑이 오는 길

<천 개의 파랑> 讀後感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오직 행복만이, 지금을 향해 시곗바늘을 돌릴 수 있다. 




<파랑이 오는 길> 

 *천선란 장편 소설, <천 개의 파랑>.


<천 개의 파랑> 속 보경의 시간은 소방관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 날에 오래도록 멈췄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시간은 이른 장맛비가 오던 여름에서 끊겼다. 눈물이 흘러 뻑뻑하다고 해도 그게 맞는 표현일까? 감정이 없는 휴머노이드 콜리에게도 의견을 묻고 싶다. 지난 6월 10일, 나도 한 사람을 잃었다. 눈물 이 시간 대신 흘렀다. 천 개의 단어를 안다고 해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지를 몰라 그 친구가 더 보고 싶기만 했다. 나는 그리움을 이기는 방법을 몰랐다. 관계는 유기적이라,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할 만한 부품을 찾을 수 없었다. 민주의 말처럼 살아있는 사람의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라는데, 나는 축축한 기억을 주름지게 잡은 채로 놓지 못했다. 이대로 흐르게 놔둘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보다 세상은 더 빠른 것을 요구했다. 보통의 사람, 적당한 우울, 혹은 그저 무탈한 사람. 올해 가 가기 전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야만 할 것 같았고, 빨리 다음 작품을 완성해야 할 것 같았다. 책을 완독 할 수 있게 된다면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될 것 같았고, 글을 쓰면 살아가는 방법을 다시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면 밤마다 잠을 설치지 않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 급한 마음을 먹고 또 먹고 뱉어내지는 못해 가슴 언저리에 답답하게 얹혔다. 내가 걷는 속도보다, 걸어야 할 속도가 점점 더 빠르게 올라갔다. 쫓아갈 수 있을까가 아닌, 완주할 수 있을까가 목표라면 좋을 텐데.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얼마 안 가 내 안에서 다른 이의 삶을 소화하는 기관이 망가졌다. 누군가를 만나고 내 삶으로 배출하는 과정에서 이만큼 먹어야 하고, 이만큼 소화하고, 이만큼 뱉어내야 한다-는 적정 매뉴얼 속 ‘이만큼’이 사라졌다. 


타인은 나를 아프게 할 수 없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타인에 지쳐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럴 때 내가 망가지게 되는 것일 뿐. 가을의 어느 날에는 컴컴한 방에 가만히 누웠다. 그러곤 연재가 콜리를 수리해주듯 내가 나를 뜯어보았다. 아, 나 망가졌구나.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났어. 그런데 지금 나한텐 이걸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정확히 어디가 어긋난 건지 모르겠어. 그 생각을 한 날, 병원에 제 발로 입원했다. 


퇴원하고 나서도 실질적으로 내 삶에서 나아진 것은 없었다. 매일매일 장례식장에 있던 3일을 하루씩 되새김질했다. 혹시나 내가 그 사람을 잊을까 두려워 남은 사진들을, 편지들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불에 눌어붙은 소방복을 닦을 수도 없었던 보경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모두 때 타고 바랬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확률 같은 건 무의미했다. 살아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올 수 없는 사람. 그것만 떠올리면 한참을 베란다에 나가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나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더는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너진 일상의 잔재에서 <천 개의 파랑>을 만났다. 


나는 마감이 멀리 있는 일에도 종종 조급해하곤 했다. 기한이 있는 일이라면 더더욱. 저 멀리 내일을 마중 나간 마음이 오늘의 몸을 섣불리 앞서갔다. 생각엔 발이 달렸고, 말에는 힘이 있었다. 좋은 것을 떠올리고, 따뜻한 말만 뱉는다면 좋을 텐데. 그런 것들만 실체가 되면 좋을 텐데. 선물 받은 책을 펼쳐두고도 하루에 몇 장 읽어내지 못하는 내가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쯤 했으면 됐다며 포기하려고만 하면 <천 개의 파랑> 속 인물들은 서로를 살리는 언어를 구사했다. 내가 나를 죽이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멀어진 거리를 회복하고, 실수를 기회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지수가 말없이 연재의 뒤를 쫓고, 보경이 두 딸에게 살아가며 가까워지듯이. 어렵게 빙 돌려 내뱉는 말보단, 직설적이지만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선호했다. 하루에 삼십 장씩, 그렇게 몇 주. 나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투데이의 목을 쓸어주듯, 내가 나를 살피고 보듬었다. 천선란의 세계를 향해 내 하루를 기울여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은혜가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쳐 “나는 강하다. 나는, 지킬 수 있다.”라고 적었던 것처럼. 나도 경마장에 나서는 투데이와 콜리를 따라 책을 펼쳤다. 느리더라도 읽어냈다. 이게 나를 살리는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몇 주의 시간이 지난 지금. 유튜브에서 자존감 높이는 방법 따위의 영상을 찾아보다 절망감에 우는 것보 다, 책 한 권을 오롯이 읽어내는 과정이 내게는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연골이 사라진 투데이에게 다시 한번 필요했던 건 트랙 위에 올라 달리는 것이었듯이, 내게도 다시 한번 책을 읽어낼 수 있다는 건설적인 용기가 필요했던 거라고. 이 책은 누군가에게 권해주고 싶은 온건한 트라우마 극복법이다. 온건하되, 가장 확실한. 달릴 때 행복한 말은, 느리더라도 행복하게 달리면 된다는 것처럼. 흐르는 시간이 담긴 글귀 앞에서 매번 무너지던 나는, 그 책 속으로 함께 낙마하며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내가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울었던 것은, 친구가 죽고 나서도 행복해도 되는가에 관한 물음이었 다. 매일 슬퍼해도 슬픔이 가시지를 않는데, 어느 날에는 웃어도 괜찮을까?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도 괜찮을까? 일상의 모든 것들에 물음표가 꼬리표처럼 달렸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한번 말해본다. 앞으로는 작은 파도에도 고통받는 사람(sufferer)이 아닌, 그 파도를 타는 사람(surfer)이 되겠다고. 내 손에 쥐어졌던 <천 개의 파랑>이 나를 일으켜 세운 파도임을 잊지 않겠다고. 막연한 마음이 들 때야말로 서로를 돕겠다고. 콜리가 마지막 순간에 누구보다 긴 3초를 보냈듯이. 콜리는 투데이가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을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낸 것처럼. 나도 앞으로 글을 쓰고, 삶을 소화하고, 나 아닌 것들과 연결되는 모든 날에 그 사람을 위한 순간을 만들어주겠다고. 


어쩌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맙다는 인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나는 이제 내 시간이 흐를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겠지. 서로를 지지하고 끌어당기는 관계 속에 서 앳된 것들이 새로이 태어날 테니까. 나는 나의 몫을 해야겠지. 언젠가 꺼내어 볼 수 있도록 커다란 그리움은 상자 안에 놓아두고. 보경처럼, 연재처럼, 은혜처럼, 콜리처럼, 투데이처럼, 그 수많은 이름처럼. 살아갈 거야. 


나에게 천 개의 파랑이 온 것도, 헤아릴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된 것도, 내일은 파랑파랑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들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다. 모든 것이 나를 살리려고 무던히도 애써준 것들 덕분이었다는 생각에 먹먹해지는 지금,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내게 와줘서 고마워. 가는 길 적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널 위해 살게.

나의 천 개의 파랑, 하나뿐인 김혜은. 


사랑하는 나의 친구에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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