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 맛 나는 하루

시고 달고 오래 남는 나의 선택들

by 행부

가끔은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불안은 대개 불확실에서 오잖아요.

불확실은 방향을 모를 때 커지고요.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

한동안 이 질문 하나를 움켜쥐고 살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고요.

답을 찾기 전까진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인생이란 바다로 나갈 수는 없다고 믿었으니까요.


근데 말이죠,

책상에 앉아 아무리 요리조리 궁리를 해봐도

짠! 하고 답이 나오지는 않더라고요.


사실 저는 공대를 졸업하고

화학회사에 취업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패션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로 훌쩍 넘어갔고요.

30살이 넘은 나이였죠.


친구들이 청첩장을 돌릴 때,

저는 사업자등록증을 낸 셈이었어요.


‘이게 내 길이 맞을까?’

스스로 수도 없이 물었지만

그때마다 정답은 없었어요.


그냥 해보는 수밖에…


헤매고 해보다 보니

문득문득 또 다른 내가 보였어요.

여행지에서 길을 잃었을 때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처럼요.


글쓰기도 그랬어요.

마흔이 다 되도록 글이란 걸 써본 적 없거든요.

그 흔한 일기도 안 썼었어요.

(초등학교 그림일기는 예외로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글로 나를 풀고 있어요.


공대 입학을 앞둔 스무 살의 나에게

“20년 뒤 넌 글을 쓰고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놀랄까요.


스티브 잡스가 그랬잖아요.

Connecting the dots.

겪을 땐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그 일들이 이어지고,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다고.


저도 요즘 조금씩 알게 돼요.

해봐야 아는 거구나.

그 경험들이 이어져서

내가 되어가는 거구나 하고요.


‘이거 내 스타일인데?’

싶은 일은 뜻밖에 나타날 때가 많더라고요.


뷔페에서 이것저것 집어먹다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것처럼요.

저는 자몽을 뷔페에서 처음 먹어봤는데

살짝 시고, 은근 달고,

그 맛이 이상하게 오래 남더라고요.


삶도 그래요.


생각만 하다 보면

입맛도, 취향도, 방향도

영영 알 수 없게 되거든요.


손을 뻗어보고,

입에 넣어보고,

“으...!” 싶은 건 뱉고,

“어라?” 싶은 건 좀 더 씹어보는 거예요.


맛을 알아야 먹는 게 아니라

맛을 알기 위해 먹는 거죠.


완성된 내가 되어

세상에 나서는 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나를 알아가는 거예요.


때론 돌아가도 괜찮고 넘어져도 괜찮아요.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니까요.


지금, 식탁 위에는

베어 물다 만 자몽 한 조각이 있어요.

약간 떫고,

조금 달고,

그리고 오래 남는 그 맛.


어쩌면 우리 선택도 그런 게 아닐까요.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그리워지는,

그래서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지는.


저는 오늘도

살짝 시큼하고, 은근 달큼한

새로운 하루를 향해 손을 뻗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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