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신 숲을 읽은 날

by 행부

집 앞 도서관을 자주 가는 이유는

가까워서도 아니요,

책이 많아서도 아닌데요.

숲멍을 즐길 수 있어서예요.


숲을 보며 멍 때리는 맛.

그 가만한 맛을 보러 2층으로 올라가요.

창가에 앉아 있으면

뒷산을 마주할 수 있거든요.


겨울엔 하얀 눈옷을 입은 나무들을 볼 수 있고

여름엔 햇살에 반짝이는 초록 바다를 볼 수 있어요.

가끔은 멍하니 그 초록을 바라보다

책장 넘기는 걸 잊기도 해요.

자연이라는 안락의자에 마음을 폭 맡긴 채로.


하지만 그날은, 읽고 싶은 책이 있어 갔어요.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제목부터 살짝 웃긴 이 책에 파스칼 얘기가 있었어요.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는 거예요.

“오늘은 시간이 없어 길게 쓰네.”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고?!

너무 맞는 말이라고 손뼉 칠 뻔했잖아요.


저는 줄줄이 길게 써넣고

자르고, 줄이고, 지우고

순서를 이렇게 바꿨다 저렇게 바꿨다 하거든요.

그러다 시간이 임박하면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발행버튼을 냅다 눌러버려요.

(사실 오늘도…)


그렇게 공감하며 읽다가 큭큭 웃음이 났는데,

맞은편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버렸어요.

얼른 정색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죠.


그러자 유난히 화창한 햇빛아래

나뭇잎들이 반짝이며 물결치는 게 보였어요.

정말 바다 같더라고요. 초록의 바다.

잘됐다. 발이라도 담그자 싶어서 일어났어요.

책 대신 숲을 읽으러 출발.


나무 아래의 선선함과 숲숲한 냄새,

짹짹이는 새소리까지

잘 왔다고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걷는데 그만,

가슴팍에 붙은 검은 벌레를 발견했지 뭐예요.

나도 모르게 "으억!” 하고 털어냈어요.

벌레가 아닌, 옷을요.


예전 같았으면

냅다 손바닥으로 ‘퍽’ 하고 해결했을 텐데요.

자연스럽게 자연 속으로 들어온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벌레 친구는 그저 나를 반겨주려 했던 걸 수도 있으니까요.

나를 반겨준 친구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죠.


그런데 혹시 이런 오해를 인간관계에서 한 적은 없을까.

내 멋대로 해석해서 날카로운 말로 튕겨내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어요.


다 내려와서 보니 이번엔 녹색 애벌레가 옷자락에 붙어있더라고요.

당황하지 않고 살며시 집어 들어 나뭇가지에 올려줬어요.

배웅해 줘서 고마워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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