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불편함에 대하여

by 행부

"아, 진짜 덥다."


지난주에 에어컨이 고장 났어요.

맙소사, 말도 못 하는 요즘 더위에...

기사님 방문은 며칠 뒤에나 가능하다는 상담을 마치고

일단 선풍기를 최대로 틀었어요.

오랜만에 시원한 수박으로 화채도 추가했더니

머릿속 시간이 거꾸로 가더라고요.

'아, 어릴 땐 이게 여름이었지.'



30년 전엔 에어컨이 흔치 않았거든요.

여름밤이면 집안 문을 전부 활짝 열고

온 가족이 마루에 모여 누웠어요.

어머니의 부채질을 자장가 삼아

잠들던 그때 그 시절.

그땐 불편한 건지 몰랐는데 말이죠.


삶이 편해져 갈수록

마음은 더 불행해지는 것 같아요.

오늘의 안락함은 내일의 당연함이 되고,

내일은 모레보다 불편해야만 하는 거죠.

옛날엔 등목 한 번 하고

그늘에만 누워 있어도 좋았는데,

선풍기가 생기고, 에어컨이 생겼어요.

이제 그걸 끄면,

몸이 뜨거운 것보다

마음에 열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지루함도 그래요.

스마트폰만 있으면 끝이죠.

지루함을 견딘다는 말은 옛말이 됐어요.

더 큰 재미, 더 큰 자극이 손안에 있으니까요.

게다가 세상은 부추겨요.

돈만 있으면 모든 불편을 피할 수 있다고.


한 번은 기사에서 봤어요.

어떤 부자가 새벽 두 시에

아이가 디저트를 먹고 싶다고 하니까

셰프를 불러다 16억을 썼대요.

기자는 은근히 말하는 거예요.

"봐요. 불편 없는 삶, 얼마나 멋져요?"

예전 같았으면 엄청 부러워했을 테지만

이번엔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 아이 말이에요.

새벽 두 시에 특급 셰프가 해준

최고급 초콜릿이 없으면,

불편을 느낄 테니까요.


그리고 저를 되돌아봤어요.

불편을 세균 대하듯 했던 나를.

박멸해서 무균실 같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더위를 견디며 알게 됐어요.

불편함이 나를 헤치지만 않는다면,

사실은 유익균 같다는 걸요.

없앨 게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는 걸요.


요즘은 일부러 작은 불편을 일상에 들여요.

잠자리에 스마트폰 두지 않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오르기,

왼손으로 이빨 닦기 같은 것들.

나를 단련시켜 주는

유익한 세균 같은 불편함들.


그랬더니 달라지더라고요.

그저께는 타고 가던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났는데

막 화가 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두 정거장 남았는데 걸어가자.

건강 챙기라는 신호인가 보네." 했죠.

작은 편안함도 감사해졌어요.

고장 나지 않은 버스,

시원한 물 한 잔에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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