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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0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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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il Choi Jun 22. 2021

새벽, 커피

돈의 맛을 배운 아저씨

킁킁킁

오늘도 라이너스는 어김없이 아침 5시 반이면 나를 깨운다. 일 년 넘게 재택근무를 했지만 그전의 버릇이 그대로 남아서 이때 일어나서 밥을 주고 때로는 산책도 시켜주고 한다. 덩치 큰 골든 리트리버는 절대로 엄마를 깨우지는 않는다. 오로지 아빠 곧 나.


전날 무리했다 싶더니 월요일 아침의 첫걸음은 족저근막염이 반겨준다. 사실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니니 아주 약한 증세의 그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새벽부터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큰 강아지의 꼬리 세례를 받으며 부엌으로 가서 밥을 챙겨주고 뒷마당에 냉큼 내보내 주면서 나도 주섬주섬 따라나서는데 얼마 전에 홧김에 라는 명분으로 구입한 전자동 커피머신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저거... 샀구나... 샀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어느 정도 무리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혹은 어느 한구석에 "꼭 사야만 했을까"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난 어려서부터 어떤 물건도 쉽게 얻어본 기억이 없다. 10살짜리 눈에도 어딘지 빠듯하게 돌아가는 집의 사정이 눈에 보이는 정도였다.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 무엇인가를 못 가져가거나 한 기억은 없으니 충분히 사랑받고는 자란 것이겠지. 아무튼 그렇게 자라고 세월이 흘러 내가 첫 월급을 받을 때까지, 완전히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나서도 좀 지나서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았던, 비디오 게임기, 나이키 운동화, 그리고 내 돈으로 유럽여행을 했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저 비싼 (적어도 나한테는) 커피 머신을 사고야 말았다.


한 모금

새 커피머신에서 내려주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계속해서 지불한 값에 맞는 맛인지를 확인하면서 뒷마당으로 나가 계단에 멍하니 앉았다. 요즘 여기저기서 읽고 듣는 경제와 재테크 정보들을 보면서 내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는 실수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며칠 전 들었던 어차피 반품할 것도 아니면서 그런 생각은 뭐하러 하냐는 아내의 돌직구에 쓸 모 없는 고뇌를 멈춘다.


두 모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30대는 그랬다. "돈확행", 갑자기 생긴 것 같은 월급을 받고, 돈이 주는 확실한 행복을 조금 맛보는 시기였다. 적당히 싼 가격의 물건이라면 의심도 없이 구매했고, 아니다 생각이 들면 쉽게 버렸다. 그렇게 지키고 유지하고 싶은 게 많아졌고, 코앞에 다가온 40대에 부담감이 더 커져 버렸다. 경제력이 주는 안정감에 취해버렸고, 정신력과 열정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다. 어릴 때의 작은 것에서 얻는 기쁨 따위는 찾기 조차 어려워졌다. 거기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사는 물건이 쉽고 좋으며, 남이 주는 물건이 마냥 부담스러워졌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팬데믹은 내 삶의 패턴을 무기한 재택근무자로 만들어 버렸고, 내 30대의 욕망의 유물들이 가득한 그 방 안에서 마저 채우지 못한 욕망들을 더 채우려고 열심히 일을 한다. 오늘도 회의가 있고 원격회의에서 내가 월급을 받을 자격이 충분함을 뽐내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좋은 월급도 받고 떳떳하게 아마존 장바구니도 결재할 수 있다. 모두한테 면도 서고,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릴 수도 있다.


마지막 한 모금

아침에 필요한 욕망들을 대충 채웠는지, 어느새 라이너스는 내 발치에 와서 엎드려있다. 무더워지는 유월의 낮보다는 봄의 추억이 살짝 남아있는 새벽의 공기가 좋은지 이내 옆으로 쭉 뻗어서 눕는다. 너는 작은 일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벌써 여섯 시반이 되어간다. 마누라를 깨우러 가야겠다.


ep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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