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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쁜 그미 Apr 25. 2024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지구인의 여유

오늘 하루, 살아있을 때.

작년 여름, 시아버지를 처음 뵈었다.


신랑이 학생일 때, 승진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셨고 그 덕에 고급 공무원으로 정년을 마무리하셨다고 전해들었다. 세 자녀 중 마지막 숙제인 아들의 짝꿍을 맞이하러 나오신 아버지는 아주 건강해보이셨고 인상도 너무 좋으셨다. 리더로서 긴 사회생활을 해오신 분답게,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잘 이끌어주셨다. 물론 나도 십여년의 인사팀 생활로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가 두렵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관록에 충분히 기대어 더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 날 시아버지는 파크골프 대회를 준비하고 계신다고 했다. 나이 들어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건강을 위해 '그냥' 하고 있다는 말씀이 덧붙었지만, 그런 의지도, 실행력도, 꾸준함도, 거기서 나온 성과도 모두 멋져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의 노년을 상상해보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건강하게 살아는 있을까. 30대 초반 즈음 막연하게 '나'라는 할머니는 "살집 적당한 모습으로 해맑게 웃으며 재즈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피아노 연습은 하지 않으면서―생각했었다. 요즘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자주 듣는데, DJ 배철수 아저씨는 70세가 넘으셔서도 항상 같은 목소리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곁들여 곡을 설명해주신다. 그 나이의 나는 뭘 잘하는 사람이려나.



생각해보면 40년도 채 살지 않은 내가 100세 인생을 고민한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도 오만한 순간인지. 지구 상의 누군가는 아픈 곳의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빠르게 삶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총소리가 하루 빨리 멎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난과 전쟁이 없는 곳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본인이 아는 방법 중 가장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현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의무와 책임을 우선으로 해야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어떤 즐거움을 추구할지 고민을 할 시간을 누린다는 것은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냐, 난 진짜 열심히 살았어.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에 갔고, 내가 회사에서 열심히 해서 인정 받아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온거야. 이 여유는 내가 노력해서 만든거야." 라고 생각했던 찰나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시대 배경을 그린 책을 몇 권만 읽어봐도 안다. 누군가는 열심히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힘든 환경에 놓여 있고, DNA나 성향상 일반적인 생활이 어려울 수도 있다. '열심히'가 어떤건지 모를 수도, 방향을 잘못 잡아서 혹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서 큰 소득 없이 몇 년 째 노력만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의 삶이 여유롭다고 느끼는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운이 키링마냥 조그맣게 따라붙었던 것이 분명해보인다.


그러니 그 누군가,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먹고 살 걱정에 쫓기지 않고 종종 하고싶은 활동을 곁들여가며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걸 고민해서 해보고 또 그만둘 수 있는 누군가라면, 이 지구에서 최상위권의 좋은 삶은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최상위는 아니어도 중상위는 될 것 같은 나이지만, 얼마 전 말도 안되게 현관 문에 손가락이 끼면서 2주 간 깁스를 하게 되는 바람에 피아노 연습을 하지 못하게 되었었다. 이제 막 연습을 시작해보려고 딱 한 번 쳤는데(...) 몇 일 뒤 바로 다쳐버렸다. 깁스를 푼 후에도,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 손가락의 뻗뻗함과 통증 완화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온수에 손가락을 담고 접었다폈다를 반복해야 했다.


시간의 효율성은 나의 노력으로 극대화시킬 수 있고, 돈은 덜 쓰고 모으면 되지만, 건강한 신체의 유지는 50세의 경력을 보유해도 어째 마음대로 안될 것 같단 말이다. 내일이 있을거라고 믿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중 하나라 했던가. 즐겁게 재즈피아노 치는 나를 할머니의 모습으로만 상상하지 말고, 오늘, 자기 전에 10분이라도 피아노를 연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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