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의 치열했던 기억, 취미 너와도 가능한걸까
내가 지치고 힘들 때면
모든 게 다 하나 둘 무너져 갈 때면
항상 나를 다시 일으켜줬던 건 음악이야
사랑이 날 울려도
험한 세상이 등을 돌릴 때도
견디게 해준 건, 날 붙잡아 준 건 내 음악이야
피아노 앞에 앉아 아픔을 말하고
기타 품에 안고서 울었던
너무 힘들었어 눈물이 흘러도
음악, 음악이 좋아서
- 작사: 박진영, 방시혁 <Music is my life>
부끄럽지만 임정희의 Music is my life만 들어도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었던 때.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최신곡과 4개국의 차트 인기곡 총 100여곡 리스트를 일주일마다 바꿔가면서 들었다. 음악 축제의 서포터에 지원하여 일하기도 했고 알바는 가급적 음악학원이나 악보 회사에서 했다. 밴드 연습과 세션이 필요한 경우 빠짐없이 참석했다. 나의 두 번째 전공이었던 작곡과는 음악회 출석 과제가 참 많기도 했다. 지하철을 이동할 때는 오선지를 꺼내어 과제를 하거나 조용히 오물오물 할 수 있는 것들로 끼니를 떼웠다.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눈과 귀는 쉬지않았다. 가끔 "내가 숨은 쉬고 있을까? 숨을 자동으로 쉴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야!"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의 모든 것을 음악에 쏟아 부었던 시절이었다.
음악과 이별하고 두 개의 전공을 모두 살리지 못한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이 된 이후, 나는 늦게―26살은 그리 늦지 않았음에도 조바심은 왜 그리 청춘들을 보채는지― 진입한 인사팀 생활을 위해 남들보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느라 각종 공부에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출퇴근 길엔 EBS 영어 듣기, 퇴근 후나 주말엔 자격증을 독학하거나 회사 지원으로 직무 역량 교육을 수강했다. 아무래도 직업과 전공이 다른 점이 나중에 흠이 될까 마음이 불편했던 사원 2년차의 나는 학점은행제까지 시작해서 1년 반 후 경영학사를 취득했다. 여직원이 많은 팀에 들어갔을 때는 화장품, 명품 등 나는 잘 모르는 대화 소재들을 잘 이해하고 싶어서 코스모폴리탄을 1년 구독해서 저녁마다 읽었다. 밑에 팀원이 생겼을 때는 리더십 개발과 코칭에 집중했고, 직무가 확장됨에 따라 관련 교육과 자격증도 틈틈히 챙겼다.
그런 나였지만 취미에 푹 빠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선 취미를 주기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의를 등록하는 등 주기성을 강제로 만들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취미에 빠져서 "오, 너무 재미있어, 이건 미쳤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몇 년 째 테니스를 치신다는 상사나, 그 피곤한 아침에도 몇 년 째 헬스장에 들러 출근한다는 동료를 보면 그렇게 부럽고 멋있어 보일 수가 없다.
대리의 직급을 달고 어느 정도 금전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는 큰 마음을 먹고 값나가는 디지털피아노를 샀다. 집순이의 집에 피아노가 있다면 당연히 자주 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피아노 위에는 먼지와 물건만 쌓여갔다. 내가 그 "입금 전후가 다른" 부류인건지, 일과 관련된 게 아니면 스스로 꾸준히 무언가를 반년 이상 한 적이 없다.
그래도 나는 무언가 하나에 빠지기만 하면 온몸을 다 담가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올인할 수 있는 사람인지 경험을 통해 안다.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시간과 관심이 하나를 향해있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눈을 마주치며 웃을 수 있는 그 추억들. 동아리 연습실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흥얼거리면 내가 키보드로 코드를 잡고, 한 명이 드럼에 앉아 비트를 맞추면, 기타를 치는 친구가 디스토션을 가득 걸어둔 사운드를 징- 하고 내던 그 순간들. 문과인 내가 작곡과 수업을 듣고 싶어서 음대 학과장님께 메일을 보냈다고 했을때, 베이스를 치는 녀석은 나에게 미친*이라고 했다. 한 번 무언가에 미쳐본 삶은 그 엄청난 에너지와 짜릿함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일에 푹 빠져있을 때의 나는 다 좋다가도 인사평가 기간마다 굉장히 불행해졌다. 나는 겉으로는 젊어보이지만 조직문화는 옛 것에 지나지 않는 회사의 인사팀원이었고, 적나라한 인사평가위원회의 현장에 매년 참여했다. 300여명 중 5명 미만의 특출난 영업적 숫자를 낸 성과자가 아니라면, 가정이 있는 사람, 먼저 입사한 사람, 나이가 더 많은 사람, 불만 표출과 소문 내기에 재능이 있는 빅마우스들에게 더 나은 보상이 돌아갔다. 팀 내에서는 승진을 앞둔 사람에게 A등급을 양보하자는 권유를 받아야했다. 순수한 즐거움으로 푹 빠져 일했고 팀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즐겁게 일했던 내게는 허탈하고 또 슬픈 결과였다. 분명 보상이라는 걸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막상 정의롭지 못한 보상을 보면―심지어 나는 그 모든 급여를 직접 처리하므로― 없던 불만과 불행이 샘솟았다.
인사팀장이 되면 바꿔나갈 수 있을거라 상상했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바로 해낼 수 있도록 평가 제도에 대한 세미나, 도서, 교육에 관심을 가졌고 타사 케이스도 많이 숙지해왔었다. 하지만 팀장인 나의 위엔 사업부 리더들의 이해관계과 CEO의 입장이 있었다. 영리적 기업에서의 정의와 합리란 아주 교묘한 모습을 하고있었다. 키맨이 서운해서 퇴사해버리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불만족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목소리를 낸다면 인사팀은 아직 더 노력해야한다, 이렇게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경영기획·지원 부서의 일은 해도 해도 밑빠진 독이다... 함께했던 대표님들은 나의 퇴사 소식을 듣고 나를 회유해주셨지만 나는 결국 지쳐서 다른 회사 다른 직무로 이동을 해왔다.
지금도 역시 일은 즐겁고, 더 잘해내고 싶어 역량을 보충하는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예전과 같은 열정은 아니다. 입사한지 1년만에 우수사원도 되었지만 이제는 이 이상에 대한 계획도 없고, 연봉이 동결된다 해도 별 감흥이 없을 듯한 느낌이다. 평가와 보상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면서 공정한 척(!)하는 조직의 생리가 싫어졌고, 그럼에도 조직에 몸 담고 있는 이유는 내 노동력의 댓가를 제일 잘 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애석한 일이다.
이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내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재미난 취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작곡에 다시 기웃거리고 있는 요즘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