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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쁜 그미 Mar 28. 2024

너무 멀리 있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취미란 녀석을 조금은 알고있다.

취미가 없다고 하면 대체적으로 반응은 이렇다.

"영화도 안보세요?"

"운동은 하세요?"

남들이 관심있어하는 무언가 중 하나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던 시절, 주말마다 비디오를 하나씩 빌려서 토요일 한 번, 일요일 한 번,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게 취미였던 적이 있다. 십자수를 놓는게 너무 재미있어서 모든 지인들에게 십자수 쿠션, 열쇠고리, 폰줄 등을 만들어 선물했던 적도 있다. 학교 축제에 나온 언니들을 보고 랩에 꽂혀서 Eminem, 드렁큰타이거, DJ DOC, 조PD 등의 노래 가사를 인쇄해놓고 완벽하게 외워 부를 때까지 따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 옛날, 중학생 때 이야기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남는 시간은 공부를 해야만 했고, 설령 공부를 안하더라도 해야한다는 의무감을 항상 가지고 있게 되었으므로 태평하게 취미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정말 미치도록 바빴다. 하루 종일 학교 도서관 열람실에 틀어박혀 책을 읽어보는게 소원이었던 때였다.


직장인 신분으로 정착하고 나서는 대략 이런 식이었다.

"요리가 재미있어, 하지만 이건 외식비를 줄이고 건강하게 먹고 살기 위함이지."

―먹어야 하는 찌개와 반찬만 요리한다.

"운동을 하긴 해야돼, 하지만 이건 목이랑 허리가 아파서야."

―아플 때나 살이 신경쓰일 때만 한두달 한다.

"책을 읽고는 있어, 하지만 이건 출퇴근 시간이 아까우니까 보는거야."

―집에서는 책을 펴지 않는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긴 해, 하지만 밥 먹을 때 적적해서야."

―집에서 뭔가를 먹을 때만 본다.

"여행이 좋아. 하지만 1년에 두세 번이면 충분해."

―이 정도 빈도수도 취미로 볼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취미가 없는 사람으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그래도 십여년 간 취미를 만들기 위한 시도는 꾸준히 해왔었다.

와인: 2시간짜리 입문 강의를 들어 보았는데, 당시 시음한 와인은 영 내 입맛에 맞지 않았고 강의는 훌륭했지만 내가 너무 흥미가 없었다. 애초에 알쓰이기도 하지만.

해금: 악기를 사지 않고 대여로 진행할 수 있어 배워보았지만 3개월을 넘기지는 못했다. 집에서 연습을 못하니 투자 비용 대비 실력이 많이 늘지 못해 재미가 없었다.

뜨개질: 세이브더칠드런 모자뜨기 후원 패키지를 우연히 얻게되었는데, 이걸 계기로 뜨개질을 배우게 되어 한 번 시작해보았다. (당시 좋아했던 박유천이 모자뜨기 교육 동영상에 출연한 것도 한몫 했다.) 하지만 별로 열정이 없었다. 그래도 매년 신청해서 모자는 떴었는데, 2022년 해당 캠페인이 종료되었다.

당구: 로망이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당구 관련 웹툰을 먼저 조금 보고 자세를 연습하고 싶어서 집 근처 당구장에 가서 친구와 포켓볼을 치고있는데, 사장님이 가르쳐줄테니 자주 오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이라 돈을 쓰러 가는게 쉽지는 않았다. 몇 년 전 사구를 기초부터 수강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생각보다 비쌌고, 저렴한 곳은 어르신들이 많아보이는 동네 당구클럽 뿐이었다.

스케이트보드: 어렸을 때 그래피티, 스케이트보드 등에 관심만 있었다. Avril Lavigne의 Sk8er Boi 때문일지도. 하지만 나이 서른에 이걸 엉거주춤 타자니 넘어졌을 때 다칠 것도 걱정이거니와, 영 부끄러워서 주말에 동네 초등학교에서 한 번 연습하고 그만두었고, 시골 부모님댁에 갈 때마다 연습하려고 갖다놓았지만 10년 가까이 꺼낸 적이 없다.

수영: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자, 일을 쉬었던 기간에 주민센터 오전 수영을 등록해보았다. 앞뒤 샤워 시간과 이동 시간을 따져보니 회사를 다니면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겠어서 발장구까지만 하고 복직했다. 팔을 휘저으면 함께 회전하는 나의 상체를 느끼며 내 몸의 근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니들펠트(양모펠트): 결과물이 너무 귀여워서 시작하려고 기초 재료와 책에 10만원 정도 투자했지만, 3번 정도 하고 손도 대지 않았다.

재즈피아노: 외국 사이트의 1년짜리 온라인 강의를 블랙프라이데이까지 기다려서 결제하였지만, 5번 정도 접속하였다. 그 중 피아노 건반을 연 적은 달랑 2번.

러닝: 동네 러닝을 두 달 정도 했지만 종아리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자세 교정 영상을 보며 연습해보았으나 다리에 잠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 그만 두었는데, 이후 시작을 안했다.

요가: 집에서 가볍게 아침저녁으로 하기 시작하였고, 이건 세 달 가까이 거의 매일 했다. 몸이 시원하니까 자연스럽게 계속하고 싶어졌다. 더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지만, 손목에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제대로 할 수가 없는 동작이 많아졌다. 손목을 고치려고 침, 체외충격파, 주사 등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큰 병원에서 '뼈를 깎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몇 개의 증상명을 진단 받고 포기했다. 발리나 인도에서 1개월 내내 요가만 하는 클래스도 관심이 있지만 손목 걱정에 선뜻 도전해볼 수는 없다.

지승공예: 전통공예를 배우고 싶어 지승공예 단기 클래스를 다녔지만 클래스가 끝날 무렵 손목이 너무 아파와서 종료된 이후로는 손이 가지 않았다. 배우는 중에는 문화재 이수자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베이킹: 어떤지 궁금해서 이마트 문화센터 강좌를 서너번 수강하였다. 하지만 강사님이 다 계량하고 준비해두신 것을 나는 섞고 붓기만 하는 활동이 대부분이라 제대로 경험해볼 수가 없었다. 집에서 해보려면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서 고민이 되는데, 우선은 오븐 놓을 공간부터 없다.

드로잉: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시도한건 여러가지이다. 여성인력개발센터의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과정을 듣고 인스타툰을 그려보려고 했지만 강좌 수강 시간 이외에는 포토샵을 잘 열지 않았다. 마트 문화센터의 어반드로잉 수업을 수강하였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이미 있는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가 대부분인 시간이었다. 동네 화실도 등록해보았지만 1시간 동안 열 몇 명을 봐주시기 때문에 진도가 아주 더뎠고 데생은 나에게 조금 지루했다. 드로잉 고전 서적을 사서 책에서 권장하는 스케줄대로 따라하려고 해봤지만 스스로 스케치북을 펼치는건 3번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여행 드로잉을 하려고 크로키 수첩을 들고다녔지만 자주 가지도 않는 여행 도중에 그림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았고, 이동 시간을 활용해보고자 기차에서 그릴라치면 손이 너무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하는 내 자신이 어이없다. 집에 그림 관련 책만 5권은 될 것이다.

부동산 경매: 취미로 임장을 다닐까해서 여성인력개발센터의 강의를 들어보았다. 임장이란 것은 여기저기 놀듯이 다녀서 될 게 아니고, 내가 사려는 한 지역의 부동산을 속속들이 잘 알아야만 경매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실제 임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등기부등본 보는 눈은 길렀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처음 만든 나의 캐릭터. 상괭이이지만 물개로 오해받는다.
지승공예는 아름다웠고 몰입의 시간은 쏜살같았다.


이 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돈을 버렸구나."

"나는 끈기가 없구나."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 중에도 배운 것은 있었다.

취미활동에 온전히 집중하는 나는 아무런 잡념이 없고 완벽하게 몰두한다. 그래서 끝나고 나면 개운하다. 특히 피아노, 드로잉, 지승, 니들펠트처럼 다음을 생각하면서 손을 계속 써야 하는 활동들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뭐든 꾸준히 천천히 하면 조금씩 나아지고 발전한다. 나는 몸치이면서 저질체력이지만 요가도 러닝도 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감과 즐거움이 붙었었다. 특히나 동네를 러닝하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매력적인지.

먹고 마시는 취미의 경우 함께 나눌 사람이 있을 때에 좋았다. 나는 시골 부모님댁에 내려가는 날 오전에 베이킹을 해서, 케익을 들고 가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집에서 혼자 먹을 때와는 그 즐거움과 보람이 많이 달랐다.


결국, 취미는 취미 고유의 가치가 있다. 일은 일이고, 취미는 취미이다..! 직무를 위한 자기계발이 나의 취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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