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핑크색 가방을 들고 나간 하루의 결말

by 벼리언니

난 이상한 징크스가 많다.

기대를 하면 그 일이 어그러지고, 하루 기분이 좋으면 그 다음날은 대부분 기분이 좋지 않고, 스트라이프 니트를 입은 날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등.


그 중에 하나가 핑크색 가방을 들고 나간 날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근데 이 가방이 꽤나 실용성이 있다. 보부상인 나에게 필요한 적당한 수납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디자인도 적당히 그럴듯하다.

그런데 난 오늘 저녁 약속을 가는길에 이 가방을 챙겨나오면서 너무 두려웠다.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을까봐.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 가방을 아끼고싶은 마음에, 오늘 기분이 좋은 상태로 마무리를 한다면, 난 이 가방을 앞으로 기분 좋은 마음으로 들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던 것이다.


근데 집에 도착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난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늘의 마무리가 좋을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를 기념하고 싶어서 글을 적어본다:)


난 오늘 할일이 있어 연차를 냈다. 그러나 할일을 계획만큼 해내지 못해서, 이 가방을 들고 나오면서 ‘기분이 안 좋을걸 걱정하는’ 내가 싫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까 더 이상하다. 내 미래의 기분이 ‘좋지 않을까봐’ ‘무서워한다‘는 이 문장이 참 말이 안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나에게 내 기분이란 이런 느낌이었다. 그날의 날씨와도 같아서, 내가 통제할 수 없고, 그저 날씨가 좋기만을 기도하듯이 내 기분이 좋기만을 손놓고 바랄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다.

내 기분인데, 남의 기분도 아니고. 오늘은 또 어떠한 일에 내 기분이 상하고 힘들어질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게 습관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 나란 사람이 제일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 기분에 영향을 내가 제일 많이 받는데, 내 기분을 따라가는게 너무 힘드니까.


근데 오늘 하나 더 깨달은게 있다. 난 그만큼 작은 일에도 금방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오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응원의 말을 들어서, 음식이 맛있어서, 화장이 잘돼서, 날씨가 좋아서 난 또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은 내가 아니므로, 기분에 속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이럴때일수록 한발짝 물러서서, 내가 처한 상황을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걸 깨달았다.


핑크색 가방을 든 날, 스트라이프 니트를 입은 날 내 기분이 안 좋았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번에 또 안좋았을 수 있다. 그래서 잘 손이 안 갔을 것이다. 그 가방을, 그 옷을 선택한 날이 점점 더 줄어들었을 것이고, 내가 그 옷과 가방을 선택한 날이 더 기억에 남았을 수 밖에 없다. 매일 드는 가방, 자주 입는 옷이면 그 수많은 날들의 기분을 다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오늘 난 핑크색 가방을 들고 나갔지만, 내 기분은 좋았던 하루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또, 내 기분에 속지 않고 사소한 그 어느 것들로 나를 다시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나를 돌보는 것. 내 기분을 살피고, 마음을 챙기며 내 기분과 감정의 주도권을 지켜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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