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고통에 닿는 도전기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도대체 얼마나 괴로워야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2014년 6월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 3년 반 동안 두 줄밖에 쓰지 못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그 아픔이 미세하게나마 전해오는 듯했다. 하필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 바람에 수시로 울컥했다가 안면에 힘을 줘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되돌리기를 반복하고는 했다.
제주 4.3 사건. 이름만 들어도 숙연해지는, 그래서 감히 어떻게 운을 뗄지 고민하며 표현을 고르다가 흔히들 포기하고 마는 이 주제를 한강 작가는 희생자의 이야기로 다뤄냈다. 피해자의 증언과 실제로 그들이 현장에서 겪은 일들 말이다.
일찍이 먼저 떠난 가족의 행방을 반세기가 넘도록 찾아 헤매는 유족,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알리는 고통을 자처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을 직접 겪지는 못했을 한강 작가 또한 후자에 합류한 셈이다. 이를 통해 나는 우리네 삶에서 '기억하려는 노력'이 시공을 초월하는 가치임을 새삼 확인했다. 오늘 영화 〈태일이〉를 보고 오열했다는 한 선배가 떠오른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그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그랬다. 고통은 '앎의 한 형태'라고,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법이라고. 고백건대 나는 자주 괴로움을 건너뛴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셈이다. 잘 알려진 대로 편함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습성을 꽤 잘 갖추고 있다. 그래서 한강 작가의 신작이라길래 막연한 기대감으로 산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적잖이 당황했고, 중간중간 불편했다. 인간적인 나에게 이토록 아픈 내용을 선사할 줄 몰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괴로움을 회피하려 했다는 점에서 나와 닮은 주인공 '경하'. 그 또한 소설의 3분의 2가 지나도록 '인선'과 그의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의식이 꺼질 정도로 몸을 혹사하던 중, 인선의 혼을 만나 반세기 전 제주도에서 일어난 참극과 그로 인한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몰입한다. 100여 페이지를 차지하는 이 대목에서 '공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경하의 반응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느덧 나는 경하에 이입돼 인선과 그의 엄마가 견뎠을 시간과 통각을 추정하고 측정해보았다. 혹 소설의 기능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돼보는 경험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나의 입장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은 '정확하고 확실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책을 덮을 즈음엔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한시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읽혔다. 그리고 한강 작가는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한다. 그가 말한 사랑을 내가 아는 사랑과 비교하며 우위를 따질 수는 없겠지만, 별수 없이 나 자신이 철부지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지극한 사랑'에 끼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비록 너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