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뇨뇨 May 16. 2024

결국 돌고 돌아 책과 글

반려 취미 찾기 (3)

시간은 많고, 하고 싶은 건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스토리 덕후답게 웹툰을 섭렵해보기도 하고, 평생 보지 않을 것 같았던 BL장르를 파보기도 했다.

볼 때는 좋았는데 핸드폰을 끄는 순간 왠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마음을 울리고 사색을 유도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취향이 확고한 편이라 책에 파묻혀 살 때도 오직 흡입력 있는 문학 작품만 읽었다. 

게임 역시 시나리오가 좋은 게임만 플레이했다. 

내러티브가 없는 콘텐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우연찮게 이기적 유전자라는 비문학, 그것도 끔찍하게도 싫은 '과학' 교양서를 만났다.    

배운 지 20년도 넘은 세포 구조와 유전 법칙, 진화론을 맞닥뜨린 나는 생각지도 못한 기분을 느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한 느낌, 자신대해 걸음 알게 같은 느낌, 지적 욕구에 허덕이던 뇌가 채워지는 느낌, 세상의 섭리를 슬쩍 들춰본 것 같은 느낌.

뼛속까지 문과생으로 과학책 표지만 봐도 울렁증이 일었고, 누구보다 수포자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과학 교양서를 보고 이런 감동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과학 분야 스테디셀러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유용한 정보들을 모르고 죽었다면 억울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릴 적부터 친구들은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었다.

성심성의껏 상담해 주면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조언을 해줄 친구들도 줄어들었지만 해줄 조언도 없어졌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정도의 별 의미도 없는 위로를 건네는 게 전부였다. 


삶에 대한 통찰도 탐구도 없이 그저 자극적인 콘텐츠에 길들여져 있던 것 같다. 

늘 치열하게 생각하는 편이라고 자부했었는데 실은 가열차게 불만을 떠올리며 자체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되새김질 한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비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과학 분야 외에도 역사, 사회 분야로 확장시켜 탐독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안들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적절한 답까지 제시하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알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가 직업이었다. 

그래서인지 의무와 보상이 없으면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웹소설을 써보라고 추천했지만 한 페이지 쓰기조차 벅찼다.

마음먹고 쓰려고 해도 초라한 표현력에 좌절하여 한숨만 쉬다가 컴퓨터를 껐다. 

꽤 재미있는 시놉시스가 생각나서 끄적였다가도 하루만 지나고 보면 촌스럽고 진부해서 이어서 쓰질 못했다.

회사 일은 어찌 되든 처리를 해야 하니 표현력이 엉망이든 글이 안 써지든 무조건 쓰고 봤지만 개인 작업은 눈곱만큼의 진전도 없었다.

업계를 떠나며 글쓰기와도 점점 멀어져 갔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계속해서 겹치고 머리가 복잡해서 책을 펴도 멍하니 딴생각만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데 어떻게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쓸 때는 정말 거짓말처럼 나를 괴롭게 하던 그 어떤 잡념도 깨끗이 사라진다.

어떻게 감정을 표현을 할까, 어떻게 글을 전개시킬까 라는 생각으로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온전히 발휘된다. 어떤 일도 그다지 상관없이 느껴져서 분노도 미움도 달아난다.

  

온라인에서 나를 알리거나 글을 공개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 흔한 SNS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 혼자 끄적이다가 하드에 처박힌 채 쌓여가는 미완의 워드 파일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이런 부족한 글을 공개하다니 염치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필력이 나아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생각도 함께 말이다.




비문학과 글.

게임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 뇌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고 패턴화 하는 경향이 있어서 했던 생각만 하고, 하던 행동만 하는 걸 선호한다. 

나는 아니라고 여겼지만 뒤돌아 보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게임할 때만큼의 극한의 성취감은 없지만 효율충 뇌에게 다른 패턴을 알려주고 유도하는 것으로 나를 이긴 듯한 기분도 든다. 


반려 취미 찾기는 결국 돌고 돌아 책과 글로 막을 내렸다.

자기 시간이 많은 싱글의 삶에서 열정과 사랑을 쏟을 대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대상이 없다면 안 그래도 권태로운 인생이 더 의미 없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을 대신하여 사랑할 대상을 찾는 여정의 결과가 만족스럽다.

이제 새로운 사랑과 즐겁게 살아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