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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고통과 관계, 그리고 공동체에 관하여

by Purity and humility

아이를 키우면 느끼는 점이 있다. 그림 한 장으로 “나는 잘한다”라며 스스로를 세우는 아이가 있다. 반장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 믿는 아이도 있다. 자존감은 항상 양날의 검이다.하지만 작은 차이를 ‘부족’이라 단정하며 세상과 등을 지는 아이도 있다. 자존감은 혼자만의 확신과 관계 속 가치가 함께 세워질 때 비로소 단단하다.



1.jpeg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

이 풍경은 아이들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의 청년, 내일의 어른, 모두 같은 벽에 부딪힌다. 자존감을 어떻게 세우고 무너뜨리는가. 이 오래된 질문에 가장 잔인하고도 정직하게 답해온 건 영화였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끝내 사랑받고 싶다는 집착에 무너진 여인의 이야기다. 칸트는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다뤄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마츠코는 스스로를 타인의 인정이라는 좁은 틀에 가두었고, 존엄은 그렇게 파괴됐다.



2.jpeg <타코피의 원죄>

《타코피의 원죄》에서 외계 생명체는 소녀를 구하려 시간을 돌리지만, 비극은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스토아 철학은 말한다. 사건은 바꿀 수 없고, 오직 태도만이 달라질 수 있다. 불교의 무상 또한 고통은 지워버릴 수 없고 함께 살아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3.jpeg <슬라이딩도어즈>

〈슬라이딩 도어즈〉는 기차를 타든 놓치든 결국 상실 앞에 선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성,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 우리는 원하지 않은 세계에 던져졌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한다.



고통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견디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기 발로 일어서야 하지만, 끝내 그 발걸음을 지켜주는 건 옆에서 내민 손이다. 피카소와 미로가 끝없는 훈련과 고통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완성했듯, 우리도 삶의 상처 속에서 성숙을 길러야 한다. 그것이 결코 틀린 길이 아님을, 우리는 선배들의 발자취와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이미 확인해왔다. 삶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음 세대와 청년들에게 남겨야 할 가장 단단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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