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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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보다 짜증이 늘었다는 걸 여행하면서도 종종 느낀다. 여행 중엔 모든 게 마냥 좋았던 나를 알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여행 중에는 더욱 여실히 보이는 게다. 얼마 전 산부인과에서 내 호르몬 수치가 갱년기 여성 수준이라는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내 몸이 예상 밖의 상황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는 핑계가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게다가 내 곁을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들이 마치 여기가 도시라는 걸 보여주듯 사무적이고 가끔은 화난 것 같다는 걸 느끼며, '짜증 좀 는 것쯤이야' 생각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나의 미래가 너무 후줄근할 것 같아 반성을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케리어를 끌고 길을 헤매며 걷는데, 혹여 내가 길이라도 물을 게 두려운 듯 내 눈을 피하는 사람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그래서 다가가려다 되돌리기를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적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곧 ‘여기 도시지 참’ 하는 생각과, ‘나도 뭐’라는 두 가지 이유가 연이어 떠오르며 서운했던 마음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결국 나 역시 여행자라는 마스크를 쓴 채 화와 짜증을 잠시 유예시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이런 생각이 들자 차라리 부정하지 말고 내 부정적인 변화도 직시하는 어른이 되어야겠지 싶다. 아닌 척 숨는 것보다는 덜 비겁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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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원래 친구와 둘이 계획했는데, 3박 4일은 좀 아쉬워 나만 하루 먼저 홍콩에 도착한 터였다.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놔두고 나오니 약간 허기가 느껴진 나는, 숙소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 위해 눈에 띄는 카페 겸 클럽에 들어갔다. 보통 늦은 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술 한 잔씩 하는 곳 같은데 나는 오후와 저녁 사이 한적한 시간대에 들린 덕에 카페를 조용히 누릴 수 있었다. 원래 간단히 디저트와 티 정도만 주문해 먹으려다 플로렌틴이 먹고 싶어져 주문해 버렸다. 저녁에 호주에서 룸메이트였던 홍콩 친구 제이와 딤섬을 먹기로 했는데, 그저 내 위장이 잘 견뎌주기 바라며 객기를 좀 부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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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와는 거의 2년 만에 만남이었다. 춘천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제이가 아이 선물을 사들고 춘천까지 와서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이번에 제이는 내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면서 유명한 딤섬집을 데려가 내게 저녁을 대접해주었다. 제이는 국경을 뛰어넘어 내게 우정이라는 걸 느끼게 해 준 친구 중 하나다. 사실 당시 호주에서 주변 한국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제이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이를 보기도 전에 들었던 그녀는 시끄럽고 특이한 아이. 하지만 6개월을 같이 살면서 느낀 제이는 그저 시끄러운 친구가 아니라, 속 깊고 강단 있으며 배려심 있는 친구였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호주 생활을 마치고도 5년 넘게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각자의 나라에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이번엔 제이의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그림을 함께 그려보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늦은 밤까지 함께 하다 두 사람과 헤어지고 숙소에 돌아가 이 날 하루를 돌아보면서, 나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이렇듯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했다. 차가운 도시와 짜증스러워진 나를 느꼈던 낮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이 마음을 더 느끼고 싶어 자는 게 아쉬울 만큼, 이 밤 이 기분을 더 길게 누리겠다고 버티고 싶을 만큼. 슈퍼맨이 되고 싶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