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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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 막바지에 나는 두 개의 일일 투어를 예약했다. 나처럼 혼자 온 여행객이 근교를 여행하기에는 투어 상품을 예약하는 게 아무래도 저렴하고 이동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일일투어로 먼저 가게 된 곳은 칸차나부리. 방콕에서 가장 유명한 한인 여행사에서 예약을 했더니, 투어에 모인 여행객들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한국 어른들 눈엔 혼자 여행 온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한 가족이 이동할 때마다 나를 챙겨 주셔서 나는 하루 동안 그 가족과 동행처럼 다니게 됐다.
칸차나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죽음의 철도로 불리는 타이-미얀마 간 철도 건설에서 희생된 포로와 노동자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에 의한 비슷한 희생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이라 어쩔 수 없이, 일장기와 함께 피를 흩뿌린 그네들의 역사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아렸다. 유적지에 와서 보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리 공포스러운데, 그 당시를 산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처참한 공기가 어땠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이어서 탑승한 죽음의 철도에서 아무리 멋진 풍경을 보아도,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값을 치르고 깔린 기찻길에 자꾸만 눈이 가 씁쓸했다. 전쟁은, 정말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뗏목 타기가 이 투어의 마지막 순서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생각으로 복잡했던 마음을 달래기에,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들의 소리와 잔잔한 강물 소리를 듣는 게 꽤나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투어를 끝내고 방콕 시내로 돌아오자 내일이 여행 마지막 날이라는 게 실감 나면서 아쉬운 마음이 휘몰아쳤다. 여행 끝에 닿아보니 내 속에 알 수 없는 힘이 생겼다는 게 느껴졌고, 그게 조금 더 쌓였으면 하는 욕심이 자꾸만 일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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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오전에 예약해 둔 수상 시장 반나절 투어를 마치면 방콕에서의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다. 여자 혼자라 불안했던 밤들과도 이제 작별이라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 사이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복잡했던 수상시장 투어를 끝내고 다시 돌아온 카오산에서 나는 매운 오징어 덮밥과 망고 셰이크로 점심을 때운 뒤, 곧장 차이 프라칸 공원으로 향했다. 내일 이 시간엔 가질 수 없을 풍경과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그렇게 두 시간 반을 앉아 2주간 담긴 생각들을 정리했다. 어쩐지 뭉클한 마음이었다.
며칠 전 배에서 만난 Y언니와 비행기는 달랐지만 출발 시간이 비슷해서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공항까지 가게 되었다. 떠나올 때 정해졌던 대로 나는 다시 나의 일상으로 간다. 스물다섯에 처음 배낭여행자가 되어 본 나는 여행 중 내내 되뇌던 말을 공항에서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일상도 사랑하자는 말. 십수 년이 지나 그때 반복해서 적은 이 말을 읽는데, 나의 일상이 어땠기에 이렇게나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했던 걸까 싶어 짠한 마음이 든다.
이후로 나에게 여행이 얼마나 큰 위안과 배움과 숨통이 되어줄지 몰랐던 그날의 나를 지금의 내가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저 꼭 안아주고만 싶다. 지난한 모든 시간들이 지나야만, 아파야만 여행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므로. 그저 힘을 내어 그 시간을 살아갈 수 있도록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
이후로 여러 번 태국을 찾았지만 나에게 태국은 수식어 그대로 여전히 미소의 나라다. 그리고 마치 중독된 것처럼 한 번씩 그 미소를 만나러 가고 싶다. 아니, 할 수 있다면 이제는 내가 그네들에게 더 웃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