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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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돌아와 자발적 백수의 시간을 두 달쯤 보내고 있을 즈음.
가장 싼 항공권에 날짜를 맞추는 게 가능했던 나는, 50만 원대 스페인 항공권을 발견하자마자 발권을 해버렸다. 내 첫 유럽 여행지가 스페인이 된 건 가장 친한 동생이 스페인에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그 옆나라 포르투갈 정도만 다녀와야지 생각하고 그 지역 전문가인 동생만 믿은 채, 아무런 계획 없이 티켓팅 후 2주 만에 나는 마드리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스크바 경유 포함 약 20시간 뒤 나는 스페인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했던 비행 중 가장 길었지만, 비행 체질인 나는 역시나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공항에서 1년 반여만에 MJ와의 조우. 우리는 MJ 집으로 향하는 내내 마치 10대 소녀들처럼 목청껏 반가운 마음을 표현했다. 수다는 그대로 밤새 이어졌고, 내 시차적응은 그렇게 대충 성공했다.
네 시간쯤 자고 일어나 본격적인 MJ표 마드리드 투어가 시작됐다. 사실 투어랄 것도 없었던 게, 호들갑 떨며 걷는 나를 용납하며 걸어주는 MJ의 이끌림에 시내 곳곳을 그저 느끼면 되는 걸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드디어 3주간의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현지에 왔으니 이제 더 이상은 미루지 말자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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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끊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비수기에 맞춰 나온, 바로 다음날 출발인 최저가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끊었다. 하지만 쉽게 정한 비행과는 달리 공항에서, 마찬가지로 급히 찾아 예약한 숙소를 찾는 데 까지는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고맙게도 두리번대는 나를 도와준 몇몇 스페인 사람들, 그리고 지하철에서 만난 세명의 미국 여행자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무사히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제대로 체크인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는지 체크인을 하는 순간까지 나를 떠나지 않던 미국인들은, 내게 다음날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제안했고 나는 기쁘게 응했다.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조식에 감동하며 느긋하게 첫 아침을 보내고,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갔다. 그들이 적어준 방번호를 내가 잘못 알아본 건지 고객 명단에서 찾을 수 없다는 프런트 직원의 대답에 당황하며 서 있던 찰나, 셋 중 한 명인 Ira가 호텔 로비로 들어서며 나를 발견해 나는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 날 우리는 정오부터 밤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Ira의 학회 일정에 맞춰 다른 두 친구가 함께 왔다는 이들은 이미 며칠쯤 바르셀로나를 둘러봤다며, 이날은 바르셀로나가 처음인 내가 가고 싶은 곳 위주로 다니자고 했다. 계획 없이 온 나는 잠시 고민한 끝에, 가우디의 작품 중 하나인 구엘 공원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여행 최초의 목적 자체가 '학회'인 그들은 나처럼 지하철만 타고 다니기엔 너무 '어른'이었던 터라, 흔쾌히 'Okay'를 외치고 곧장 택시부터 불렀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나는 하루종일, 나 혼자였다면 절대 타지 못했을 택시를 타고 다녔다. 이게 웬 호강이냐 싶으면서도 몇 번씩이나 택시를 얻어 타는 게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장난스레 1유로만 내라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던 그들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바르셀로나에서 첫날 첫 목적지로 높은 곳에 위치해 바르셀로나 전경을 바라보기 좋은 구엘 공원을 고른 건 생각보다 멋진 선택이었다. 나보다 나이는 한참 많지만 장난기 다분한 이들과는 이쯤에서부터 어색함도 느낄 수 없어져서, 우리는 따로 또 같이 공원과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이 날 나는 택시비와 마찬가지로 배낭여행자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싼 간식비와 식사까지 그들에게 얻어먹으며 다녔다. 마치 얻어먹으려고 그들을 찾아간 듯 느껴져 자꾸 미안하다 말하는 내게, 그들은 매번 얼마 안 되는 돈이라며 자신들이 사겠다고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은 한밤중에 길도 못 찾고 떠도는 어린 배낭여행자에게서 그네들 자신의 소싯적 모습을 떠올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내게는 태국의 골목길로 먼저 각인된 람블라스 거리를, 이번에는 스페인을 떠나기 전 기념품 쇼핑을 하느라 바빠진 그들에 내가 맞춰 걸어 주었다. 그리고 람블라스 길 어딘가에 이어진 항구에서 어둑해져 가는 바다를 바라보는 걸 끝으로 우리는 이벤트 같았던 이 날의 여정을 마쳤다. 다음날 이탈리아로 가는 그들은 이번에도 내게 같이 이탈리아로 가자고 농을 쳤다. 생각지 못한 시끌벅적한 하루를 선물 받은 그들과 끝까지 유쾌했던 시간을 포옹으로 마무리하고, 나는 다음 날 이어질 만남을 떠올리며 호스텔로 돌아갔다. 다음 날엔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목사님 가족을 찾아 뵐 예정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반가운 만남들이 이어지니 내 여행이 꽤 특별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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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냄새가 솔솔 풍기는 한인교회에서 몇 년 만에 만난 목사님 내외와는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세 번쯤 만났다. 집에 초대되어 두어 번 염치없이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몬세라트와 시체스를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길 위에서 만난 타인과는 되려 더 편하게 속엣말을 하게 되듯, 두 분과 한국에서 알고 지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나는 많은 걸 배우고 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어딜 가든 길은, 나에게 그저 먹고 걷고 즐기게만 놔두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게 여행은 배움 그 자체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내게 떠날 이유를 준다. 내 인생 처음으로 마주하는 지중해 바다였던 시체스나 저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도 좋았지만,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어쩐지 이런 만남들에 더 마음이 쏠렸다. 덕분에 당연하듯, 놓쳤던 바르셀로나를 보러 다시 갈 이유를 챙긴 기분.
내내 흐리던 날씨도 다음을 기약할 핑계가 되어 주었는데, 마지막 날 만큼은 날이 몹시 좋았다. 그래서 빗속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시체스 바다 풍경 대신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앉아 다시 지중해를, 산 조셉 시장에서 산 저렴한 먹거리를 천천히 먹으며 내 기억에 담았다.
이제 스페인 남부로 떠날 시간. 다시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나는 유럽의 여느 저가 항공사의 무사 착륙을 반기며 울리는 박수 소리가 들릴 때까지 푹 잤다. 생각보다 바쁘게 다니느라 쌓인 피로가 풀리기에 충분한, 정말이지 꿀맛 같은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