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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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낭을 멨다.
호주에서 1년여간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상이라는 이유로 지난 나의 여행들에 비해 호화스러웠던 두어 달 전 호주 여행과 달리, 나는 다시 예산이 빠듯한 배낭 여행자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비교적 물가가 저렴한 스페인이지만, 호주나 동남아의 여느 국가들에 비해서는 비싼 편이다 보니 나는 나가는 돈이 제법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무조건 아끼기만 하느라 중요한 걸 놓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적당히 머리를 써가며 즐기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자정 넘어 마드리드에 도착한 나는, 그라나다행 아침 버스를 타기 전까지 MJ와 수다를 떠느라 밤을 새웠다. 덕분에 그라나다까지 가는 다섯 시간 동안 지루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버린 나.
수도인 마드리드나 관광 도시인 바르셀로나와 달리 스페인 남부에서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익히 들어온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라나다 버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꽤 멀어 시내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골목 안 숙소까지 찾아가야 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좀 애를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글맵으로 길을 찾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 말 그대로 지도 한 번 보고 감과 사람들에 의지해 목적지를 찾아야 했으니. 하지만 그런 여행들 덕분에 길치인 내가 끊임없이 낯선 길에 오를 만큼 깡이 붙었으니 나쁜 것만도 아니었지 싶다.
숙소에 짐은 대충 풀어두고 나는 곧장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했다. 숙소가 있던 골목에서 입구까지는 굽이 진 길을 꽤 오래 걸어야 했는데, 나는 그 길이 참 좋았다. 오래되고 꾸깃한 지폐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그 길 끝에 마주한 알함브라 궁전은, 고즈넉하고 화려한 두 가지 분위기로 입구에서부터 나를 압도했다. 물론 난생처음 보는 이슬람적인 요소가, 하루 전까지 가톨릭 건물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바르셀로나에서 건너온 내 눈엔 더욱 강렬하게 비치긴 했다. 은은한 듯 강렬하게 각인된 이슬람적 색채부터 그에 뒤질 수 없다는 듯 덧입혀진 르네상스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 기술이 혼재된 공간에 있으니, 정복하고 무너지고 다시 정복하기까지의 지난 역사가 상상되어 잠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궁전이 주는 '현재'의 아름다움에 나는 다시금 여행자의 마음을 되찾았다.
그렇게 두 시간쯤 머물렀을까. 알함브라 궁전만큼이나 오래 누리고 싶었던 유럽의 오래된 건물 방 한켠에서의 하룻밤을 위해 나는 야경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앞으로 10일쯤 스페인 남부와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다녀오려면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 중 하나씩은 과감히 빼는 게 좋으리라는 생각도 3할쯤 있었다. 나는 뜨거운 물 가득 담긴 욕조에서 반신욕까지 마친 뒤 이틀 만에 제대로 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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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대로 지난밤 한 번도 깨지 않고 숙면한 덕분에 나는 알람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서두르지 않고 코르도바행 버스를 타러 갈 수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로 향하는 길에는 자느라 도시 외곽 풍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놓친 만큼 보겠다는 심정으로 잠 한숨 자지 않고 창밖을 구경했다. 게다가 스페인에 도착하고 내내 흐린 하늘이 아쉽던 차였는데 고맙게도 슬슬 구름이 걷히는 게 보여 내 기분도 함께 맑아지는 듯했다.
작고 귀여운 코르도바에서 내가 묵게 된 숙소가 나는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오래된 벽에 벗겨진 색을 덧칠하고 있던 주인 분의 응대는 다소 무뚝뚝했지만, 문을 열자마자 마주 보이는 창밖으로 너른 광장이 보이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 입꼬리는 올라갔다. 하룻밤 밖에 누리지 못하는 게 아쉬워 방 이곳저곳을 눈과 사진으로 담다가 생각보다 늦게 도착해 점심을 놓친 게 생각나, 나는 근처 베이커리를 찾아 나섰다. 배낭여행 할 때 돈을 아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식비를 아끼는 건데, 예컨대 나는 하루에 1유로짜리 큼직한 바게트를 하나 사서 삼등분하여 세끼를 해결했다. 카페 갈 돈도 당시의 내겐 사치였으므로 마트에서 1리터짜리 주스를 사서 들고 다니며 마셨다. 아무튼 어떤 일이 있어도 제 때 밥 먹는 것만큼은 놓치지 않는 나로서 점심시간이 늦춰진 건 큰 일이었으므로, 나는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길거리에 서서 우걱우걱 바게트를 씹어 먹었다.
다른 날들과 달리 이 날은 먹구름 사이 한 번씩 맑은 하늘이 나타나 주었다. 그러다 늦은 오후쯤 흐리기만 하던 하늘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비를 쏟아 냈는데, 하필이면 내가 코르도바에서 가장 큰 기대를 하며 찾아간 로마교 앞에서였다.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꿈꾸었던 이 감격적인 순간을 놓칠 수 없었던 나는 비와 함께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바람에 맞서가며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보니 온통 우스운 사진들 뿐이었지만, 몇 장 남긴 셀피 속 나는 그 어떤 장소에서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말라가. 좁은 골목들이 대부분인 곳을 걷다가 현대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말라가에 도착하니, 한동안 나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다녔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는 어딜 가볼까 생각하다가 높은 곳이 좋겠다 싶어 나는 먼저 알카자바로 향했다. 날이 맑으면 지브롤터 해협 건너 모로코도 보인다는데, 그만큼은 아니었지만 맑았던 하늘 아래 나는 바다를 실컷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상하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방 속에 나눠 두었던 바게트를 꺼내 먹었다. 이만큼 먹으면 질릴 법도 한데, 자리를 달리해가며 먹으니 나는 전혀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부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먹고 힘을 얻어 말라가에타 해변가를 걸을 때까지 이어진 생각의 요는, 나의 여행이 조금 더 분명한 이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호주 워홀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나는 스물일곱 살 '한국' 청년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다. 적당한 나이가 보이지 않는 법처럼 정해진 듯한 취업 그리고 결혼을 독촉당하는 자리. 그러나 그걸 극복하는 과정도 내가 바라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나는 누가 바라는 삶이 아니라 나 다운 삶을 살자는 다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나는 25년간 살아온 한국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쪽으로 더 쉽게 마음이 틀어졌다. 그런 내 모습이 싫어 도망치듯 스페인으로 온 나는 아마도 그래서,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여행에서처럼 오롯이 내 모습으로만 설 힘이 아직 부족했던 20대 후반의 나는 그랬다. 그 고민은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꽤 오래 이어졌고, 다행히 나는 내 결론을 얻었다. 길과 길이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전달하는 치가 되고 싶다는 것으로. 여행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이제 나는 안다. 길이 주는 이야기를 듣고 삶으로 살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즐기는 것 그 자체이며 기쁨이라는 걸. 10년이 훌쩍 지난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느낀다. 점점이 찍혀 있는 여행의 이야기들이 떠나지 않은 시간들에까지 이어져 지금의 나에게 닿아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름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