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치앙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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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간 여를 달려 드디어 치앙마이에 예약해 둔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며 우연히 한국에서 온 Y언니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언니는 무작정 치앙마이에 온 거라 정해진 게 없다며 내가 괜찮다면 함께 가도 되겠느냐 물었다. 여행 3일 만에 처음 만난 한국 사람인 데다, 여행 베테랑으로 보였던 언니의 인상이 무척 좋아 나는 언니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했다. 다행히 여행 비수기라 내가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에 빈 방이 있었고, 이 날 아침 식사 후 곧장 가기로 되어 있었던 고산족 마을 트래킹도 예약이 가능한 상황이라 언니는 얼떨결에 트래킹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예약을 마치고 우리는 드디어 100밧에 제공되는 뷔페식 아침을 먹었다. 배낭 여행자들에게 100밧은 3끼 식사 값이므로 나는 세 접시를 가득 채워 배불리 먹었다.
10시쯤 게스트 하우스로 픽업 온 현지 가이드들은, 필리핀의 지프니보다 조금 작은 썽태우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며 다른 여행자들을 몇 명 더 태웠다. 다 모이고 보니 한국인은 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중간에 시장에 들러 비상식량 등 필요한 것들을 산 뒤 우리는 드디어 산 입구에 도착했다. 일정 시작과 동시에 가이드들은 능숙하게 점심밥을 준비해 주었는데, 매식사마다 여유분도 꼭 챙겨주었다. 뷔페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도 손 맛 좋은 그들이 해준 밥을 두 그릇이나 해치웠다.
최근 코끼리와 함께하는 투어에서는 사람이 코끼리를 타는 게 학대와 같다는 인식 때문에 코끼리 목욕시키기 등으로 바뀌었지만, 14년 전인 이때만 해도 코끼리 타기는 태국 투어에 빠지지 않는 일정 중 하나였다. 아무튼 오자마자 밥 먹고 코끼리를 타다니, 생각보다 트래킹 힘들지 않구나 생각했으나 그것은 우리에게 잠시 던져준 당근이었다.
이후 시작된 산행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딱 한 번 있던 휴식시간까지 3시간을 한 번도 쉼 없이 걷기만 했던 거다. 비까지 내리는 와중에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내가 이전에 걸었던 그 어떤 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5년 전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4박 5일간 돌면서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랜만에 그런 다짐이 머릿속에서 삐죽 댔다. 그런데, 이처럼 재밌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세 시간 내내 나와 동행들 사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쨌든 정상이 있는 게 등산 아닌가. 우리는 드디어 고산족 마을 주민의 한 집에 도착했다. 당연하게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편리한 어떤 것도 갖춰져 있지 않은 이 집에서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우리는 씻고, 자고, 먹어야 했다. 하지만 스스로 돈 내고 선택한 이 시간에 대해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대여섯 시간의 힘든 산행 뒤였으므로 우리 모두 저녁 식사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세 명의 태국인 가이드는 소위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재미있었던 건 밥을 뚝딱 만들어내는 그들을 보고 거기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그들에게 장가 잘 가겠다고 말했다는 거다. 그렇게 준비된 이 날 저녁 메뉴는 구운 호박과 닭다리가 얹어진 그린 카레, 그리고 안남미로 지어진 밥. 모두들 허겁지겁 깨끗이 먹어치웠다.
제대로 된 등이 없는 고산 마을에 까만 밤이 찾아왔다. 가이드들이 사이사이 초에 불이 켜자 작은 무리 몇 개가 만들어지며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내 영어 실력은 그들의 이야기 흐름을 좇기 힘든 수준이라 대화는 곧잘 끊어졌고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는 게 내 탓인 것 같아 나는 상대에게 미안하고 아쉬웠다. 아마도 이날 밤이었던 것 같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게.
프랑스에서 온 28살 친구들, 이스라엘에서 온 캠퍼스 커플, 영국에서 온 절친 둘 그리고 나와 Y언니는 세 명의 가이드와 함께 둘러앉아 어느새 한 무리가 되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나라별 별자리 이야기나 태국에 대한 소감 등을 주제로 오랜 시간 수다를 떨다가 지루할 때쯤 게임도 하면서. 그리 국적이 다양한데도 이상하게 내놓는 게임 아이디어가 비슷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눈으로 볼 게 한정적이라 되려 작은 아이디어에도 재밌게 놀 수 있었던 것 같다.
BTS나 <오징어 게임> 등, K문화가 널리 퍼진 지금은 한국에 대해 아는 외국인을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들어 봤다는 사람을 만날 정도로 한국은 인지도가 낮은 나라였다. 그런데 영화 얘기를 하던 중 프랑스 사람이 <올드보이>와 가수 비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평소에 많이 생각해 본 적 없는데도 우리나라 문화가 주제로 올라온 것 자체만으로 우쭐해진 나는 한참 동안 안 되는 영어로 그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 그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표정으로 그네들과 있어 행복한 내 마음을 표현했다. 수다를 끊는 게 고된 산행으로 피로한 몸을 눕히는 것보다 힘들 줄이야. 이름도 낯선 메뗑이라는 고산 마을에서의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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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내내 추위에 오들오들 떠느라 몇 번을 깼는데, 묘하게도 피곤은 말끔히 풀려 있었다. 부은 얼굴로 일어나 옆에 있는 Y언니를 보는데, 밤새 내가 추울까 봐 담요를 덮어주던 언니의 손길이 떠올라 마음이 뭉클했다. 알게 된 지 이제 24시간을 갓 넘겼는데 느껴지는 마음치고 짙었던 이 감동은 이 날 하루치를 충분히 넘길 만큼이었다.
세 명의 가이드들은 또 분주히 손을 놀려 우리가 너무 배고파지기 전 아침상을 뚝딱 차려냈다. 나는 역시나 접시 가득 채워 뱃속으로 옮기고 하산을 준비했다.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알겠지만 원래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게 더 힘들다. 겨우 오르는 근육을 좀 썼나 싶은데 내려가려니 몸이 싫다며 버티듯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데 어찌나 힘이 들던지. 하지만 오르는 길과는 또 다른 풍경과 분위기에 마음은 계속 즐거웠다. 자연 그대로가 아름답다는 식상한 말은, 그 말과 달리 언제나 새롭고 좋다.
뗏목 타기와 리프팅 등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이제 마지막 식사만이 남았다. 마지막 점심식사 메뉴는 팟타이! 내 규칙적인 성향에 한껏 맞춰주는 투어의 식사 일정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흔해서인지 입맛에 맞지 않아서인지 유난히 다른 친구들이 음식을 남겨서 나는 팟타이 두 접시에 후식으로 준 수박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I will miss this time…”
그들에게 남긴 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표정으로 부족한 영어를 대신해 어떻게든 채워 표현한 뒤, 썽태우에 탄 우리는 각자의 숙소에 도착해 내릴 때마다 자다 깨어 인사하다를 반복했다. 여행지에서 모두 여유 있는 가슴으로 만나서였을까. 나는 마치 오랜 인연들과 헤어지듯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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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이 날 나는 100밧짜리 도미토리를 예약해 두었는데, 입실하니 그날 그 방에 머무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함께 투어를 했던 Y언니는 이 날 라오스에 가기로 되어 있어 잠시 숙소에서 시간을 때우다 떠났는데, 그 잠깐 사이에도 가난한 여행자인 나에게 몇 번이나 음식 같은 걸 채워주었다. 언니는 받을 때마다 멋쩍어하는 내게 자기가 어릴 때 그런 여행 선배들을 만나 받은 게 많다며, 언젠가 내가 만나게 될 누군가에게 갚으면 된다고 했다. 참 고마운 인연이었다.
떠나는 언니에게 인사를 나눌 땐 약간 뭉클했는데, 곧장 다시 혼자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면서 약간 흥분이 되었다. 그래서 들어가 쉬려던 발걸음을 거리로 돌려 잠시 님만해민의 밤거리를 구경하다 가기로 했다. 그렇게 십분 쯤 걸었을까. 한 외국인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건축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딱 봐도 배낭여행객인 내게 뭔가 궁금한 게 많은 듯 잠깐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물었다. 밤인 데다 여자인 나로서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 거절했더니 자신이 설계한 설계도면까지 보여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한참 주저하다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져 나는 그의 요청대로 근처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태국에 대한 이야기, 같은 동양인으로서 내가 보는 태국 사람들에 대한 소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물었다. 짧은 영어로 그와 대화하기 위해 나는 핸드폰 속 영어 사전을 몇 번이나 검색해 댔는지 모른다. 참 젠틀했던 그는 일하러 처음 온 태국과 태국을 여행하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적이 낯설고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 같은 배낭여행객을 살면서 처음 본 듯,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저렴한 금액으로 여자 혼자 여행을 떠나올 생각을 했느냐며 나를 신기해했다. 그는 내게 평범하지 않은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역시나 내 짧은 영어 때문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나는 한국에서처럼 유별나다는 얘기가 아닌 특별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치 칭찬을 받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태국 여행 4일 차. 몸살을 앓으며 왔던 첫날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하루하루 힘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숙소에 돌아오니 이 큰 방에 혼자 3천 원가량의 돈을 내고 쓴다는 사실이 방콕에서의 첫날밤처럼 호사스럽게 느껴졌다. 길었던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