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방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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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든 나는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잤다. 만원 남짓한 숙소라는 게 무색할 만큼 좋은 잠이었다.
이 날 밤에 치앙마이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탈 생각이었던 나는 체크아웃 후 배낭은 게스트하우스에 맡기고 가볍게 길을 나섰다. 흥분이 가라앉은 카오산의 낮은 전날 밤 내가 보았던 모습과 정말이지 달랐다. 전날 본 화려한 카오산 로드가 강렬했던 탓인지 한적한 카오산이 낯설어 나는 두리번대며 거리를 걸었다. 낮의 카오산에서는 수많은 냄새가 났다. 희뿌연 연기들 사이로 낯선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걸 구경하는데 2년 전 필리핀 바기오에서 본 거리 음식들이 생각났다.
그렇게 카오산 거리, 짜끄라 폼 거리, 람부뜨리 거리 등지를 천천히 걷다가, 치앙마이 여행 후 방콕으로 돌아와 해 볼 만한 근교 여행을 예약하기 위해 유명한 D한인 여행사를 찾아 투어 두 개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시 짜오 파거리, 팟 아팃 거리, 싼 띠 짜이 쁘라 칸 공원까지 또 걷다, 파쑤멘 거리 어디쯤에서 허기를 느낀 나는 30밧짜리 덮밥 한 접시를 사 먹었다. 맛있다는 뜻의 태국어인 “아라이 막”을 소심하게 외치고 식당을 나온 나는 다시 후식을 위해 Sun St.라는 식당 겸 카페에 앉아 멍하니 여유로운 그 시간을 즐겼다. 밤에 13시간 동안 이동이 있을 예정이기에 유유히 거닐고 멈추는 모든 시간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밥값과 똑같은 가격에 립톤 아이스티를 먹으니 자리값 톡톡히 치르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보다는 돈이 좀 더 있어 보이는 옆 테이블의 유럽 커플에게만 길거리 상인들이 다가선다. 마치 생각을 읽힌 것 같아 멋쩍어진 순간.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그 커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몇 차례 아이 컨택이 있긴 했지만, 그들이 내게 말을 건 것도 아닌데 영어도 못하는 내가 겁도 없이 먼저 "Hi!"를 외친 거다. 단어로 이어갈 수밖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던 문장은 “I can’t speak english very well.”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짧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도 분명히 내 유럽 여행에 대한 꿈을 그들에게 알렸다. 알아들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이스티 한 잔 값, 아니 그 이상을 머물다가 나는 치앙마이행 야간 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미리 알아둔 여행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길을 좀 헤매느라 몇몇 태국인들을 붙잡고 길을 물었는데 생각보다 영어를 잘하는 태국인들. 그리고 내가 헤매는 표정으로 서 있으면 말을 거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 중 사기꾼이 많다는 걸 꽤 지나고야 알았다) 아무튼 어렵게 찾은 여행사에서 친절한 사장님 덕분에 나는 기분 좋게 버스 예약까지 마쳤다.
앞으로 며칠은 몸이 좀 힘든 일정들이라 나는 태어나서 처음 마사지를 받아 보기로 했다. 몇몇 가게의 가격을 비교한 뒤 내 눈에 가장 저렴하면서 깔끔해 보이는 샵에서 180밧짜리 타이 마사지를 받았다. 내게 마사지를 해주었던 어린 소녀는 힘이 좋았고 마사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여린 소녀에게 한 시간 너무 큰 힘을 쓰게 한 것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칭찬, "예쁘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나에게 700밧짜리 마사지를 권해주었다. 미안해, 난 돈이 없어.
어느새 어스름해진 저녁, 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다시 배낭을 찾아 길거리 적당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라 돈을 쥐어줄 수 없던 아빠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빵들을 한 아름 사다 주셨고, 배낭여행자인 나에게 그것은 꽤 도움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무슨 벤치가 도로에 그리도 가까이 있었을까 싶지만, 배가 고팠던 나는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든 말든, 매연이 입과 코로 들이치든 말든 상관없이 맛있게 그 빵들 중 하나와 우유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출발 십오 분쯤 전 여행사로 갔더니, 여섯 시에 출발한다던 버스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정해진 시간을 얼마간 넘기고서야 출발했다. 기대 이상으로 컨디션이 좋은 2층 버스의 2층 창가 자리에 반쯤 누워 가면서, 나는 13시간의 여정 동안 내가 잘 잘 수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