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프로이트와의 만남과 성격분석/심리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에 인도 푸네에 자리한 명상과 심리요법의 세계적인 명소인 오쇼 국제 명상 리조트의 The school of Healing art에서 리밸런싱 신체심리요법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고, 신체심리치료와 신체심리학을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에 소개한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다양한 메소드의 개발과 활발한 임상 그리고 그에 따른 데이터의 축적이 진행되면서 심리치료의 한 방법으로 인정받으며 단순히 치료법이 아니라 학문의 한 분야로써 위상을 다져가고 있다. 국내에서도 여러 가지 신체-심리 지향적인 요법들이 소개되고 있고, 관련 서적들도 간간이 번역 소개되며 불모지 신세는 면하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분야로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몸은 거대한 우주의 신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은 우주라고 한다. 이 작은 우주는 마음을 담고 있으며 거대한 우주를 향해 그 마음의 날개를 펼칠 줄도 안다. 마음의 가변성은 무한하지만, 몸과의 관계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몸은 마음의 드러남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가장 진실한 역사이다.
이렇게 몸과 함께 하는 마음이건만 몸과 마음은 별개인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마음의 고민이 있으면 그것은 단지 마음의 문제이니 그저 마음만 괴롭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마음의 괴로움이 단지 마음의 괴로움으로 끝나는 법은 없다. 한국인에게만 있다고 WTO(세계 보건 기구)도 공인한 화병(火病), 사랑앓이 상사병(相思病), 신경성 또는 심인성이라고 이름 붙인 각종 질환 등 어느 하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냥 마음의 병으로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막연히 “마음이 아프니 몸도 아프네”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게 아니라 몸과의 구체적인 상관성을 탐구하여 신체심리 지도의 내비게이션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통합적 치유의 장이 열리고 그 효율성은 배가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의 미약한 산물이다. 이미 몸을 다루는 많은 전문가가 있고, 마음을 다루는 전문가도 많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므로 상호 이해는 피할 수 없는데, 이 둘 간의 가교가 바로 신체심리학이다. 전문적으로 몸과 마음을 다루는 직업인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일반인도 읽고 한 번쯤은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닐까 한다.
자신의 몸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며 고통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살면서 끊이지 않는 몸마음의 괴로움을 줄이고 줄여서 마침내 행복하고 평온한 지금 여기에 오롯이 존재하길 소망하는 소박한 뭇사람들께 도움이 되길 두 손 모아본다.
서양 심리학과 그 치료의 역사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의 위상은 물리학의 아인슈타인과 같다. 그의 정신분석(psychoanalysis)으로부터 현대 심리치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마음에 관한 임상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에 따라 마음의 영역이 과학의 장으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심리학을 뜻하는 psychology라는 단어도 자신의 연구에 붙일 이름을 고민하던 프로이트가 그리스어로 나비를 뜻하는 psyche(Ψυχή)를 떠올림으로써 시작되었다. 나비(psyche)는 죽은 자의 영혼이라는 고대의 통념에 따라, 그리스신화에서 ‘영혼의 여신’의 이름(프시케)이 되었고, 이후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 또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오늘날 정신의학과 심리학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프로이트의 ‘psychoanalysis’를 문자 그대로 풀면 ‘나비 해방’이 된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름과 함께 거론될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한, 시대를 앞서간 불운한 천재 한 사람을 기꺼이 여기에 소환하면서 신체심리치료(Body Psychotherapy)의 역사를 시작하고자 한다. 신체심리치료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빈(Wien) 정신분석학파의 정신과 의사이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과 더불어 프로이트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이다(1920년대에 프로이트는 그를 빈 정신분석협회에서 최고의 두뇌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고 총애했다).
라이히는 초기(1920년대)에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치료와 성격분석(character analysis) 연구에 몰두하며 《성격분석》을 저술할 만큼 정신분석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지만, 언어를 도구로 하는 심리치료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신체로 눈을 돌렸다. 언어 의존적 기법(method)이 거의 무의식에 잠겨있는 어린 시절(특히 0~7세)의 기억과 상처를 끄집어내는 데 있어서 그리 적합한 도구가 아니라는 점(실제 라이히는 환자들이 언어분석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에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믿었던 꿈에 주목했고 그 해석에 주력했다면 라이히는 심리 문제가 신체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확실히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라이히는 많은 [정신] 분석가들이 환자의 비언어적 행동(안색이나 표정, 몸짓, 옷)을 과소평가했을 뿐 아니라 완전히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 마이런 섀라프(Myron Sharaf 1926~1997; 정신의학자, 빌헬름 라이히 전기 작가)
라이히는 모든 불안과 신경증이 신체에 경직과 울혈을 만들어내서 에너지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런 해소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이 특정한 근육을 지속해서 경직시키거나 경련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이히는 이것을 ‘muscular armour’라고 불렀다). 라이히는 경직된 근육에 강한 압력을 가하거나 깊이 마사지하면 통증을 동반하는 강한 감정 반응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근육의 울혈과 경직을 직접 풀어줌으로써 심리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임상(臨床)으로 입증했다.
이는 근육경직이 일어난 곳에는 해소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 기억이 억압되어 있음을 뜻했고, 근육을 강하게 압박하면 억압되었던 그 감정도 함께 소환됨을 의미했다. 게다가 감정을 억누를수록 근육이 더 경직되고 아울러 경직된 근육의 영향으로 호흡도 부자연스러워짐을 발견했다. 이런 환자에게 목구멍을 열고 숨을 내뱉게 하고 긴장된 근육을 눌러 풀어주면 극적인 감정 반응과 함께 치유가 일어났다.
감정과 근육 그리고 호흡의 상관관계는 너무나 확실했다. 이후에 그는 신체(호흡 포함)를 직접 다루는 생장요법(vegetotherapy)으로 심리치료의 방법을 바꾸었다(그는 1934년에 성격분석적 생장요법character-analytic vegetotherapy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몸을 통해 마음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의 패러다임 전환이자 신체심리치료의 역사적인 개막식이었다.
“라이히는 내가 여러 해 동안 찾아온, 신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결합한 그런 사람이다.” - 알렉산더 S. 닐(1883~1973; 영국 서머힐 학교 창립자)
“빌헬름 라이히는 인간이 자신을 억압하는 방식은 근육의 수축에 의한 것이며, 삶에서 근육 수축을 장기간 지속하면 습관화되어 점차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놀라운 답을 제공했다.” - 토마스 한나(Thomas Hanna)
라이히는 심리치료과정에서 환자들이 과거의 감정적인 충격이나 상처에 직면했을 때 몸의 특정한 부분에 긴장과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극적인 한 예로, 라이히는 “특수한 성적 피학증(masochism)을 가진 환자의 진료에서 환자의 심리뿐 아니라 골반 근육조직 역시 경직되어있음을 알았다. 이 경직으로 인해 그 환자는 강렬하고 즐거운 흥분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받아 흥분이 고통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 환자의 이런 발작은 어린 시절의 항문기적 금지와 갈등과 연관되어 있었다. 환자가 바지를 더럽혔을 때 아버지가 심하게 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로, 어린 시절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행동을 부모로부터 비난받았던 아이는 “자신의 성기적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참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조건화로 인해 계속 숨을 참았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무력화시켰다.”
어린 시절에 양육자로부터 자행된 감정분출에 따른 강력한 처벌과 비난은 이후 감정분출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을 낳는다. 아이는 처벌과 비난을 피하고자 감정분출을 억압해야만 한다. 감정억압을 위해 숨을 죽이고, 몸의 특정 부분을 긴장시키며 억누른다. 이런 방어기제는 인생 내내 지속된다. 라이히는 이러한 지속적인 방어기제로 인해 구조화한 만성적인 근육 긴장을 근육무장(muscle armor) 현상이라고 불렀다.
근육무장을 발견함으로써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심리적 개념인 ‘억압’이 신체와 결부된 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근육무장은 단순히 긴장된 근육과는 다르다. 감정억압 기제로 근육 긴장을 꾸준히 반복함으로써 나중에는 역으로 근육 긴장으로 인해 도리어 감정이 억압된 상태가 되는데(이때 그 사람은 감정에 무감각해져서 마치 감정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을 근육무장이라고 한다. 근육무장 현상은 처음에는 우리의 감정을 모두 폭발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방어기제로 작용하지만 곧이어서 감정표현의 걸림돌이 되어버린다.
근육무장 = 감정억압 ⇆ 근육긴장
이 성적 피학증 환자와 같은 여러 임상 사례를 겪으며 라이히는 심리치료의 관점을 “성격분석적인 경직에서 신체적인 경직으로, 성격무장(character armour)에서 근육무장(muscular armour)”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러한 “신체적인 경직과 골반의 경련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걸쳐 있는 ‘갑옷 조각들’에 집중”하게 된다. 이후 라이히의 치료법은 근육무장을 제거해서 그 속에 갇힌 감정 문제(강박, 불안, 신경증 등)들을 해결하는데 주안점을 두게 된다.
이것은 당시의 정신과 의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라이히도 자신이 발견한 자명한 임상 결과를 철회할 뜻이 전혀 없었다. 그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로써 라이히는 정통 정신분석치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방법론과 연구 방향은 스승인 프로이트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심지어 빈(Wien) 정신분석협회와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다. 결국, 그는 협회에서 제명되었다(제명까지는 원치 않았던 프로이트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그를 극도로 싫어했던 파울 페더른이 이 사건을 주도했다).
이후 독일의 베를린과 덴마크의 코펜하겐 그리고 스웨덴의 말뫼를 전전하다 1935년에 북유럽의 노르웨이(이 시기에 라이히는 훗날 오르곤이라고 명명하게 되는 바이온 에너지를 발견한다)로 활동무대를 옮겼지만, 기득권 정신의학계에서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겨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추방 운동을 벌였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독일 나치의 박해까지 더해졌다.
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1939년) 라이히는 거기서 오르곤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신이 ‘오르곤(orgone)’이라고 이름 붙인 생(生) 에너지(오르곤은 동아시아의 수행자들에게는 기(氣)로 알려져 있고, 인도의 수행자들에게는 쁘라나로 알려져 있다)에 관한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이 오르곤 에너지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에 두루 퍼져 있는 생명의 근본 에너지라고 믿었다.
라이히는 신경증이나 강박증 따위의 심리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근육무장뿐만 아니라 오르곤 에너지 흐름이 정체되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근육무장을 풀면 정체되었던 에너지의 흐름도 원활해졌다. 그는 이 에너지가 질병 치료에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오르곤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모으는 장치(orgone accumulator)를 개발해 의료용으로 대여했다. 이 일로 미국 식약청(FDA)에 의해 고발되었고, 그가 제안한 과학적 검증 절차도 무시한 채 그에게 적대적인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관들이 내린 부적절한 결론(이로 인해 법원은 사용금지 명령을 선고했다)으로 이 오르곤 축적기(orgone accumulator)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 자료들도 불태워졌으며 이미(旣) 출판된 저서들도 대부분 소각 파기(일부는 검열)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몰이해 속에서 그의 사회적 평판은 매장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른바 라이히 개인에 대한 현대판 분서갱유가 자행된 셈이었다.
1956년 라이히는 ‘축적기 사용금지 명령’ 불이행을 이유로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고 2년 형이 최종 확정되어 미국 펜실베이니아 루이스버그 연방 교도소에 수감(1957년 3월)되었다가 그해(11월) 그의 인생 후반부에 이따금 말썽을 일으키며 병적인 징후를 보이던 심장의 문제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했다(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베이커(Elsworth F. Baker; 1903~1985)는 추도사를 통해 그가 왜곡과 허위 그리고 박해에 맞서다가 죽은 ‘그리스도의 살해’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애도했다.
라이히는 생전에 정신분석과 심리학 그리고 자연 과학을 아우르는 새로운 통합적 학문인 오르고노미(orgonomy)를 정립했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그의 젊은 학생들에 의해서 그의 작업은 계승되었고, 1967년 라이히 학파의 기관지 ‘The Journal of Orgonomy’의 발행을 필두로 ‘The American Collage of Orgonomy’라는 전문 교육기관 설립(1968년)에 이르기까지 라이히 관련 연구소와 학회 등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그의 업적과 작업이 재조명되고 있다.
라이히로부터 시작된 신체심리치료는 멸시와 조롱으로 점철된 어두운 역사를 딛고 오늘날 심리치료의 한 분야로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신체심리요법(Body Psychotherapy or Somatic Psychotherapy)에 대한 라이히와 그 학파의 공헌과 영향은 말할 것도 없이 지대하다. 유력한 두 단체인 유럽신체심리치료협회(EABP)와 미국신체심리치료협회(USABP)도 라이히가 신체심리치료의 효시임을 천명(闡明)한다.
생체에너지학(bioenergetics)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로웬(A. Lowen; 1910~2008)과 핵심에너지학(core energetics)의 존 피에라코스(John Pierrakos; 1921~2001)와 같은 라이히의 제자들인 신라이히주의자(neo Reichian)들은 물론, 그에게 교육 분석을 받았던 프리츠 펄스의 게슈탈트요법(gestalt therapy)과 아서 제너브(Arthur Janov; 1924~2017)의 프라이멀요법(primal therapy), 론 쿠르츠(Ron Kurtz; 1934~2011)의 하코미요법(Hakomi therapy) 등 신체지향적인 심리요법들은 라이히로부터 상당히 많은 부분을 빌려왔다.
“유능한 과학적 견해는 이미 진지하게 라이히의 연구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목은 너무나 뛰어나서 더는 웃음거리로 깎아내릴 수 없다. 죽어가는 신들과 살인 기계들이 널브러져 있는 마지막 사막의 끄트머리에서 라이히는 프로이트를 떠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듯이 사유의 천국으로 걸어 들어갔다.” - 필립 리프(Philip Rie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