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이 온 미국의 성별
영어 다시 배워야 함
어느 날, 교수가 어떤 높은 사람을 소개해줬다. (내 프로젝트에 돈을 지원받을 방법을 알려줄 사람)
그러면서 하는 말.
"'그녀'가 알려줄 거야... 어쩌구 저쩌구..."
그러다
"말 나온 김에 '그'에게 지금 이메일 보내줄게."
라는 것이다.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있을 때...
"아, 미리 알려줄게. 그 사람은 가끔은 '그'이거나 '그녀'야. 둘 다 써."
"오...? 알려줘서 고마워. 새롭네...?"
이렇게 나의 영어 패치는 2024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가끔 버그 발생 예상)
작년에 미국에 와서 가장 충격 먹은 게 한 사람이 자신을 '그들(they)'라고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남자는 He/Him, 여자는 she/her, 다수는 they/them 이라고 달달달 10년을 외웠는데 새 문법이 생기다니!
가뜩이나 영어를 하루 종일 쓰려니 머리와 혀에서 쥐가 나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적응을 했다.
그.러.나. 2024년 새 버전이 나왔다.
바로 한 사람이 he/him/she/her를 모두 사용하는 것.
기존 문법도 겨우 버벅대며 돌리고 있던 내 오래된 머리에 업데이트를 계속해야 한다.
이거 업데이트 필요함미국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 이해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편인 것 같다. 누가 '난 오늘부터 OOO 하기로 했어'라고 말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 그렇구나'하는 분위기.
많은 사람들과 다른 것을 하기로 한 것은
용감한 선택이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그렇구나'라고 하는 것
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내가 불편하니 개명 전 이름 부를게, 어차피 그건 가짜잖아.
얼마 전 인터넷에서 친구가 개명을 했는데 자기는 끝까지 예전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사람의 글을 봤다. 그 글쓴이는 다른 친구도 사주 상 개명했는데 그건 가짜 이름이니 개명 전 이름으로 계속 부를 거고, 내 개인 성향이니 네가 이해하라며 개명 후 이름을 거부했다고 한다.
사연을 보니 실명을 언급했는데 예전 이름은 잘못 발음하면 욕처럼 들리는 이름이고 개명한 이름은 무난한 이름이다. 개명한 이름은 온갖 이쁜 척하는 것 같고 가짜 이름이라나, 예전 이름은 영혼이 있는데 이건 없다나 뭐라나. (속으로 그동안 자신의 이름과 비교하며 우월해했던 걸까? 남의 이름에 이렇게까지 평가하는 에너지를 쏟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개명하고 모든 서류를 바꾸고 주변에 설명하는 일은 굉장히 번거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명하는 데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비속어거나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서, 혹은 끔찍한 부모 밑에서 자라서 다른 이름으로 새 출발하고 싶다던가, 아니면 사주를 믿는 사람은 예전 이름이 굉장한 불행을 불러온다던가 하는 이유. 그럼 자기가 어린 시절 기억을 없애주거나 팔자를 고쳐주거나 할거 아니라면, '그런 건 신경쓰지 말고 살아.'라는 잔소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주변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개명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다.
그 번거로움은 당사자가 겪는 번거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리 사는 것도 얼마나 바쁜데, 따질 걸 따지자.
현재 외국에서 나온 성별 호칭도 이런 맥락이라고 이해하면 설명하기 쉽다.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누가 봐도 남자인 사람이 어느 날 '그녀' 호칭을 사용하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 공표할 때는 큰 용기와 차별을 감당해야 한다. 이 사람을 '그녀'라고 불러주는 것은 우리에게 차별도, 금전적 손해도 없다. 약간의 적응 노력뿐이다.
우린 모두 같은 '인간' 종이고 그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니까.
돈도 안 드는데 뭐. 소원이라는데 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뭐.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가고 호칭 따위 뭐 어때 하고 대충 넘기지 뭐.
이런 거 하나하나 걸고 넘어지기에는 중요한 게 너무 많으니까.
아래처럼, 진짜 따지고 잔소리할게 더 많잖아.
뭐, 아무튼 화장실 사용 후 손을 꼭 씻으세요.유튜브: @phdco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