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내 사랑은 장바구니 안에 담겨있었다. 월계수 잎. 콜라. 양파. 통후추. 수육용 삼겹살 한 덩이. 200ml 팩소주. 장을 보고 나오면 저만치서 슬슬 마중 나오는 저녁과 그보다 느리게 다가오던 한 사람. 그 사람과 손을 잡아보는 상상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장바구니를 드는 일. 언젠가 이 손아귀에서 악력이 다 빠져나갈 때 나는 어떤 사랑을 붙들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재료만 읊어도 식탁이 그려지던 메뉴처럼 그날 내가 내보이고 싶던 마음은 어렵지 않았다. 냄비에 차곡히 쌓은 재료 위로 불만 올리면 되는 것.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알고 있지만 자꾸만 뚜껑을 들춰보게 하는 것. 고기를 써는 나의 리듬과 현관을 두드리는 당신의 리듬이 엇비슷하게 흐르고, 문을 열자 마음 어딘가에 만들어둔 냉장고까지 덩달아 열릴 때, 열린 김에 아직 내어준 적 없는 김치를 꺼내보는 것. 이거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거라는 장난과 함께.
자취를 하다 보면 알고리즘에 자취요리가 뜨고, 레시피를 따라 재료를 재단하거나 간을 치다 보면 사랑의 성질이 요리와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량을 맞출 필요가 없다든지, 그래서 1인분의 마음이 2인분으로 번지게 된다든지, 한껏 달아오른 마음에도 레스팅이 필요하다는 점이 그렇다. 생각해 보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길어다 쓰는 비유도 대체로 요리이다. 사랑을 '퍼준다', 감정이 '식었다', '깨가 쏟아진다'. 이처럼 사랑이 요리와 연결되는 건, 사랑에도 얼마간의 실패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간만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슬픔을 너무 쏟아 관계가 밍밍해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자신만의 레시피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을 자취와 요리와 사랑을 1:1:1 비율로 버무려 만든 양념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여기에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생각을 넣어준다면, 그때는 양념장을 넘어 만능 양념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느 저녁, 고등어를 굽기 위해 달궈진 프라이팬 위로 기름을 둘렀다. 곧 자욱해질 연기를 생각하니 그냥 에어프라이어를 쓸까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내 손으로 직접 고등어를 굽고 싶었다. 기껏해야 껍질이 타지 않게 두어 번 뒤집어주는 정도지만, 그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사랑은 기꺼이 비유를 내어주니까. 이를테면 사랑과 연애의 상관관계. 사랑이 고등어 같은 원물에 가깝다면 연애는 일종의 프라이팬이다. 사랑은 연애가 제 스스로 타지 않도록 해주고, 연애는 사랑에 기름을 칠하고 저도 모르던 향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부엌을 종종거리는 나. 아마도 프라이팬과 고등어 모두를 지켜내는 것이 그 즈음의 미션이었던 것 같다.
자취방에 반찬은 욕심이라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반찬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바로 영상이다. 유튜브나 OTT를 곁들이지 않으면 도저히 밥을 뜨기가 곤란한 것이다. 내 경우 점심을 먹을 땐 유튜브를 보고 저녁을 먹을 땐 OTT를 보는 편이다. OTT 연애 프로그램에 과몰입하던 시절이 있다. 이런저런 논란도 많고 실제 커플로 이어지는 경우도 거의 없다지만 사랑의 다양한 양태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즐겨 봤다. 그만큼 연애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기였고, 사랑에 관한 저마다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성격을 맛으로 치환하여 '하트시그널'은 순한맛 '나는 솔로'는 매운맛 등으로 표현하곤 했다. 확실히 같은 파스타라도 전자는 알리오올리오 같은 느낌이 있고 후자는 얼큰해장짬뽕파스타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환승연애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김피탕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이름만 들었을 땐 기가 차지만 먹어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근데 중요한 건 나는 아직 김피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
소설가 김기태는 위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착안하여, 자신의 소설 <롤링 선더 러브>에서 '솔로 농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 거기서 출연진들은 본명 대신 양파, 토마토, 브로콜리와 같은 야채로 호명되는데, 귀엽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한 5박 6일의 여정 속에서 나는 뜬금없이 감자전이 먹고 싶었다. 그 마음이 덮이기 전에 책을 덮고 냉장고를 열어 감자 두 알을 꺼냈다. 감자전의 핵심은 오로지 감자로만 전을 부쳐야 한다는 것. 어려울 건 없다. 숭덩숭덩 썬 감자를 강판에 갈고 체반에 거른다. 그럼 반죽과 전분물이 분리되는데, 물을 따라낸 전분을 반죽에 섞어주면 그만이다. 이처럼 감자전은 별다른 가공 없이도 접시 위에 보름달을 띄울 수 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사람들과 새벽을 나누며 가만가만 사랑을 느끼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껏 자취와 요리와 사랑에 관해 실컷 떠들었지만, 사실 지금의 나는 자취도 하지 않고 요리는커녕 부엌에 갈 일도 없고 사랑은 뭐 언제나 어렵고... 그렇다. 하지만 식어야 맛있는 음식이 있듯, 자취와 요리와 사랑에 열렬하던 한때로부터 조금 멀어졌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맛있는지 맛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정반대로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별점 대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별을 보던 순간을 남겨줬으면 좋겠다. 그 마음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