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탄생 <단어수집가>
2024년 9월의 마지막날, 서울혁신파크 야외 테이블에서 그림책 모임을 가졌습니다. 파란 가을 하늘의 유혹에 실내로 들어갈 수가 없었죠. 족두리봉, 비봉 등 북한산의 기운찬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그림책을 읽어주고 느낌을 나누는 우리가 그 자체로 훈훈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M은 <아빠가 되고 싶어요>를, 저는 그림이 예쁜 <한밤의 선물>을 함께 나누었죠. K는 빈손으로 와 빨리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날 J가 가져온 <단어수집가>. 저는 이 꼬마의 행복한 표정과 멋진 행동에 확 끌렸습니다. 다양한 단어를 수집하여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고 즐기는 꼬마를 여러분에게도 소개합니다.
‘단어수집가’라는 큰 제목 아래 눈을 감은 소년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습니다. 하늘색 바탕에는 여러 단어들이 구름처럼 떠다니네요. ‘고마워’, ‘속삭이다’. ‘연결고리’, ‘교향악단’, ‘용맹하다’, ‘짙푸르다’, ‘자유로운’, ‘평화’, ‘치솟는’.
꼬마가 알기 어려울 것 같은 단어도 보입니다. ‘양자역학’, ‘동시성’, ‘작렬하다’. 저는 요즈음 제 마음을 표현한 ‘고마워’와 ‘자유로운’에 마음이 갑니다.
아! 소년은 마치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살짝 감은 눈, 경쾌하게 올린 두 팔, 올라간 입 꼬리를 보니 아주 만족스러운 연주를 하고 있나 봅니다. 단어들을 다양한 악기로 삼은 악단의 지휘자, 소년은 단어수집가입니다.
표지를 열면 양면 가득히 펼쳐진 하늘에 노란 단어카드들이 마치 새처럼 날아다닙니다. 파랑새 한 마리를 친구 삼아서요
책을 펼치면 다양한 수집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뭔가를 모으는 사람을 수집가라고 해
어떤 사람은 우표를 모으고
어떤 사람은 동전을 모아
돌멩이를 모으기도 하고
예술품을 모으기도 해
어떤 사람은 곤충을 모으고
운동선수 카드나
만화책을 모으는 사람도 있어
그리고 제롬은 뭘 모으냐면
낱말을 모아.
단어수집가지.
어린 시절, 저는 우표를 모았습니다. 우체국에 근무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기념우표가 나오는 때를 잘 알 수 있었죠. 우체국 큰 유리문 앞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줄 서서 기다리는 때가 생각납니다. 지금은요? 마음에 쏙 드는 그림책을 모으는 사람이 되었어요. 여러분은 뭘 모으시나요?
주인공 제롬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새로운 단어를 모읍니다. 길에서 본 간판에서도, 책을 읽다가도 단어를 모읍니다. 무슨 뜻인지 통 모를 낱말도 모읍니다. 음유시인, 명멸하는, 탐미주의자 같은 근사한 말들을요.
수집한 단어가 점점 많아지자 제롬은 날씨, 식물, 감정, 숫자, 동물, 다정한 말 등등으로 분류를 합니다. 어느 날 제롬은 낱말책들을 옮기다가 넘어집니다. 어쩌지요? 단어들이 모두 뒤죽박죽 되어버렸어요.
나란히 있으리라 상상도 안 해 본 단어들을 연결하여 제롬은 시를 씁니다. 그 시로 노래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제롬은 간단해도 아주 힘이 센 말도 알아갑니다. ‘괜찮아’, ‘미안해’, ‘고마워’, ‘보고 싶었어’. 더 많은 낱말을 알게 될수록 여러 생각과 느낌과 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어느 날, 제롬은 낱말들을 수레에 싣고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싱긋 웃으며 낱말들을 골짜기 아래로 날려 보냈죠. 이제 단어들은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제롬은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뭐든 움켜쥐고 있을 때보다 함께 나눌때 더 빛난다는 것을 제롬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쟁이 기질을 가진 저도 요즈음 <단어수집가> 주인공 제롬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예쁘고, 깊고, 따뜻하고 독특한 단어와 문장을 열심히 노트에 적으며 모으는 중이죠. 최근 로맹가리의 소설 <노르망디의 연>을 읽었습니다. ‘연’, ‘순수’, ‘의리’, ‘정체성’ ‘도주는 내 취향이 아니야’ 등이 마음에 남습니다.
오래된 TV프로그램 ‘한국기행’을 좋아합니다. 오늘은 전남 해남의 어느 마을을 소개하고 있네요. 달래, 냉이, 쑥, 봄동, 서러운, 해풍, 상큼, 군침, 고소한, 냄새, 이장님, 환장, 희한해, 농사, 일 부자, 건강, 한마음, 솜씨, 달콤, 덕분, 선수, 아흔여덟 번째의 봄, 이렇게 많은 단어를 수집할 수 있네요.
유뷰브에서 역사 강사 최태성의 강의를 듣고 또 단어를 모아봅니다. 쓸모, 답게, 의미, 철학, 나답게, 단단, 역사, 도리, 정성껏, 연대.
이런 단어들을 모으다 보면 저도 언젠가는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같은 문장도 만들어낼 수 있겠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신을 배려하는 친구 수연에게 건넨 뭉클한 대사 말입니다.
단어 창고가 늘어날수록 제 삶이 풍요로워짐을 느낍니다. 봄이 게으름뱅이처럼 느리게 오고 있는 요즈음, 여러분에게 꽂힌 단어나 문장은 어떤 것인지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