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묻어나는 이 날씨에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고

by 르몬트

어학 공부만 가득한 하루에 숨통이 되어주는 찰나의 시간이 있다. 일과 중 꼭 지키려 한 점심식사 후 1시간가량의 산책이 그것이다. 물론 어학시험이 다가오며 이마저도 부담이 되어 며칠을 빼먹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 5월의 초중반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를 정도로 날씨가 좋아서 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고개만 들면 넘실거리는 초록빛 잎들과 새하얀 뭉게구름,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수채화 같은 하늘이 바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고층 건물에 가려 매일매일 자연스럽게 마주하긴 어려운 풍경들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자연스레 머물러 있는 이 자연들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급작스레 조깅이 성사되어 여인 세 명이서 이른 아침에 운동복을 입고 만났다. 혼자 산책을 할 때는 낮 시간, 그리고 주로 걸었는데 이렇게 아침에 달리는 것도 좋다. 밤사이 새로이 필터라도 교체한 건지 폐 속으로 상쾌한 공기가 가득 차는 느낌이 가장 기쁘다. 지나가며 청설모가 한 마리도 아닌 무려 두 마리가 엉켜 있는 것도 보고, 무엇보다 아침 조깅의 좋은 점은 샤워를 마치고 상쾌한 몸으로 나와도 아직 이른 시간이라는 점 아닐까.


하루하루 달라지는 풍경을 느리게 감상한다. 옷자락에 스며드는 바람에서 여름의 내음을 점점 더 강하게 느낀다. 이런 날씨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늘 이맘때면 갖기 마련이지만 결과적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올해에도 어김없이 떠올려 낸다. 이윽고 곧 더워질 테니, 이 다정하고 명랑한 날씨를 곁에 더 두고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진다. 심각한 길치라 지도 어플이 없으면 높은 확률로 엉뚱한 길에 들어서곤 하는데, 한국에서 걷기를 즐겨했을 때도 그랬고 이곳에서도 절감하는 구절이다. 돌아가야 하는 곳과 정반대된 길이라 할지라도 모든 길은 이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걷다 보면 우연히 지름길을 발견할 수도, 정 길을 찾지 못한다면 간단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적어도 길 위에서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길 위에서 사람이 할 일은 그저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이고, 가끔 가다 눈길이 닿는 아름다운 것들을 오랫동안 담아두는 약간의 노력이면 충분하다.


정말 오랜만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밤의 사색>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뼘의 하늘, 정원의 초록 나무 울타리, 튼튼한 말, 멋진 개, 삼삼오오 떼 지어 가는 아이들, 아름답게 감아올린 여인의 머리,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눈을 떠 자연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거리를 걸어가면서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고 소중한 것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도 눈은 절대로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맑아지고 더 좋아진다. 설령 흥미 없게 보이거나 흉하게 생겼더라도 모든 사물에는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보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볼 수 있다.


내가 하루 중 걷는 것을, 바람을 느끼며 햇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초록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자연을, 그리고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100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98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