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에서 맞은 친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밤을 새면서
네가 없는 삶을 상상했어. 철없던 중학생일 때 우리가 같은 반이 아니었더라면, 친해지지 않았더라면,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서로를 소홀히 했다면, 친했던 만큼 격렬히 다퉜던 열여덟과 열아홉 살의 시간들 사이 허무하게 멀어졌더라면, 우리가 지나온 그런 순간들 속에서 말이야. 생각해 보면 우연에서 비롯된 건 거의 없었어. 우리가 친해지고 이렇게 지금까지 소중히 관계를 지니고 온 것이 말이야. 돌아보니 모든 건 우리의 선택이었네. 우리는 이렇게 인연을 이어갈 사람들이었나봐.
그래서인지 네가 없는 나의 지난 하루들이 어떻게 채워졌을지 그리하여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가 어려워. 우리가 그렇다고 매일을 만나거나 - 물론 그런 때도 있었지만 - 서로 없이는 죽고 못 산다거나 그런 열렬한 온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그랬다 한들 진작에 심하게 데었거나 둘 다 타버리지 않았을까. 그러니 언제나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언제나 미지근하게 은은한 온도로 내가 부르면 너는 그곳에, 네가 부르면 나는 이곳에 있는 그 거리감이 어쩌면 우리의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 걸어갈 길들을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공상도 덧붙이지.
넌 내가 본 가장 강하고 진지한 사람이야.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사이에 편이 나뉘어 자주 싸우고 그 사이를 누군가가 중재하고 여러모로 복잡하고 고단했던 - 그렇지만 지나고 나니 별것 아니었던 나름 사투했던 우리의 고등학생이던 시절, 화장실 앞의 복도에 서서 한참을 너의 생각을 내게 들려주던 그때부터 나는 저 말을 하고 싶었어.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내 못된 습관 때문에 아마 입안으로만 굴려 끝내 꺼내지 못했겠지만. 확실히 형용할 수는 없지만 저 시절의 너와의 대화가, 네가 들려주던 평소의 너의 생각의 바다들이, 그리고 윤슬처럼 반짝거리는 너의 꿈이 네가 곧잘 하던 장난처럼 명랑하고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을 모은 하늘과 같이 높아서 그때 이후로 내 안에도 무언가 바뀌었어. 그 순간을 기억해. 넌 정말 강하고 진중한 친구라서, 멍청하게 너의 영원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내가 언젠가 나 역시 너처럼 단단해져서 네가 그랬듯 언젠가 나 역시도 너에게 강해진 어깨를 내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 건 말이야. 이건, 친한 친구의 생일이니까 기억에 남을 하루를 선물해야지, 힘들어하면 위로하러 어디든 달려가야지, 날 찾을 때면 함께 해야지와 같은 평상의 결심과는 달랐어. 누군가를 위해, 특히 친구를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건 돌이켜보면 네가 처음이었어.
재수를 할 때 수업과 자습까지 마치고 지친 몸과 마음에 더 무게감이 실리던 여러 밤들, 폴더폰 너머로 새내기로서 대학생활의 이모저모와 너의 감정들을 시냇물이 흐르듯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시원 근처의 공원을 걷는데 밤의 공기가 뺨으로 다가오는 그 순간이 여전히 기억나. 고등학교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스펙트럼을 성인이 되어 하나도 빠짐없이 맞이하고 있던 그때의 네가 귀엽다고 생각했어. 귀엽게 재잘거리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목소리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쉽기도 했지. 물론 이 말도 직접 너에게 전하지는 않았겠지만.
가끔 너의 진중한 생각들이 너의 강인함을 잠시 누를 때가 있었어. 첫 이별을 겪고 괜찮다 말을 하지만 지쳐 보였던 너에게 몇 마디의 별 도움도 되지 않았을 위로를 건네고 어깨를 토닥였던 나도 어렸었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너를 만나면 달리 어떤 걸 해줄 수 있었을까. 생각이 많아 그것을 꺼내려다가도 자칫 주변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언제나 너 자신보다 남을 살뜰히 챙기던 너의 배려를 그만 내려놓고 그저 이 순간만큼은 유유히 헤엄치는 너의 생각들을 가만히 다 꺼내도 돼. 아마 이렇게 속삭이지 않았을까 싶네. 모를 일이지만.
먼 이국에 있으며 너에게 과연 부치기는 할지 모를 편지를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장에 쓰고 있으니 너와의 순간들이 파도로 밀려들어오는 모래알들처럼 눈앞에 다가왔다가 다시 쓸려 내려가네. 우리 나름으로 진중한 대화들을 나눌 때면 네가 강한 사람이라 느꼈듯이, 너의 일상을 하나씩 들려줄 때면 네가 귀엽다 느꼈듯, 네가 힘들어하지만 그걸 잘 내색하지 않을 때면 잠시만이라도 무거운 짐을 내려두고 큰 나무의 그늘 아래 눈을 감고 쉬고 있을 너를 바라고 상상했듯이, 새로운 출발을 하는 날 근사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 반짝반짝 빛날 너의 모습을 본다면 오래 알아와도 아직도 새로운 모습이 남아있냐는 듯 놀라움을 느꼈던 지난날들과 마찬가지로 너의 새로운 기억이 하나 더해질 텐데. 그 감상을 놓치는 것이 가장 아쉬워.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수많은 모래알 같은 날들이 많으니 조급해하지는 않을게. 아마 나이가 더 들어서도 너와의 일상 속에 새로운 너의 모습을 알아가는 건 내 앞으로의 기쁨 중 하나일 테지. 어떤 멋들어진 말을 늘여놓아도 마음에 차지 않거나 제자리를 찾지 못해 부유할 그런 우리의 우정을 늘 그래왔듯 열렬하지는 않지만 은근한 온도 속에 머물게 하자. 그래서 네가 날 부르면 이곳에, 내가 널 부르면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어 서로가 찾기 쉬운 곳에 있는, 그 적당한 거리감으로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곧 증발해 버릴 시시한 이야기도 나누었다가 또 마찬가지로 허무히 옅어질 깊은 마음속에 담아둔 생각들도 꺼내 보이자. 삶에서 큰 각인을 남기는 것은 강렬하고 잠깐의 만남이 대부분일 거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각인은 오래 그리고 천천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그리 말하자.
너의 안녕과 평화를 늘 바라고 축복해.
오늘만큼은 너를 짓누르는 무게들을 내려놓고 너의 반쪽과 함께 나무 밑에서 달콤한 바람과 선선한 그늘을 느끼며 한껏 쉴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어제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요. 식장으로 걸어가는 친구 뒷모습 보면서 막 울었어요.
왠지 아주 헤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헤어지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하고요. 아저씨는 저보다 좀 더 사셨으니까, 그만큼 헤어진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렇지요?
- 그랬겠지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그래?
아저씨는 더 이상 헤어질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 만남을 간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언제나 헤어짐으로 완성되기 마련이야.
그래도 헤어지는 건 정말 싫다.
노영심 & 김창완, '안녕'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351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88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