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단계를 지나며

비탄: 몹시 슬퍼하면서 탄식함.

by 르몬트

주변의 소중한 존재를 상실했을 때 겪는 감정변화의 5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사랑하는 나라가 비이성적인 고작 몇 사람 때문에 무너지려는 것을 보며 느끼는 나의 감정과도 같다. 이국에서 고국의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으며 믿고 싶지 않았던 부정 단계를 지나 격분이 일어나면서도 이미 상황이 벌어졌으니 어서 빨리 수습하기를 바라는 타협을 지나 현안 긴급 질의의 영상을 보며 이제는 비탄스러워진다.


자유와 평화 위에서는 어떤 가치도 그 힘을 잃는다. 오직 자유와 평화가 전제될 때만이 모든 일에 내재된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라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이 최상의 가치를 간과하고 어떠한 내용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주창한 목적과 그 수단을 믿어달라 했던 말은 적어도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 성립되지 않는다. 설령 계획했던 대로 국회를 점거하고 계엄을 유지했더라면 국민들이 그러려니 하고 따랐겠나? 그렇다면 그 다음 총구는 민중을 향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 본인의 거짓말이 이렇게 금방 드러나리라는 것을 말하면서도 과연 몰랐을까? 100분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이런 말은 해도 되겠는지 모르겠지만’이라 서두에 붙이며 조심스레 언급했던 대통령에게 인지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이러한 내중을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책임자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질의한 영상을 보았다(그마저도 중심 사령부들은 출석을 거부했지만). 그들은 인사치레라도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경찰총장과 국회를 수호하는 국회경비대는 다시 대통령의 계엄명령이 떨어지면 최고 지도부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과 다름 없는 이야기를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꺼내 놓는다. 국민의 여론은 이미 명확한데도 여전히 국민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대통령에게 잘 보이겠다는 의중을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현장에 있던 의원들과 마찬가지로 말을 잃는다. 한나 아렌트가 참석해 상세히 과정을 그린 아이히만의 재판이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목격한다. 왜 역사를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그런 사람이 왜 지도부까지 가서 이런 사단이 벌어지게 두었는가? 씁쓸한 결론이지만 이건 결과적으로 모두 우리의 잘못이다. 이런 역사를 적어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었다. 역사를 알지 못하는 자가 책임자나 관계자로 올라가 긴급한 상황에서 최고가치나 인간성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시켜서”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기막힌 장면이 21세기에 재현되어서도 안 되었다.


7년. 또 다른 어이없는 국정농단을 지나 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법률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분명히 모두가 보았다. 강산이 변하는 시간도 지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잊어버렸나 보다. 냄비근성이라는 말은 여기에서도 유효한 것일까? 결국 다시 그 당연한 가치를 꺼내어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어떤 가치가 가장 선명하게 남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이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제2의 아이히만이 심문받는 자리까지 올라가 아연실색한 증언을 하는 것을 국민들이 듣지 않도록, 모두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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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 글을 쓰고 나서 이틀 뒤 탄핵안이 의결된 자리에서 김건희 특검법에 반대표를 던지고는 곧바로 의회장을 급히 나가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모습이 라이브를 통해 그대로 전파되었다. 시민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추운 겨울 여의도로 나가 쏟아내야 했다. 탄핵이 부결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투표조차도 참여하지 않는 모습이 야밤 급작스레 황당한 소리를 뱉었던 대통령의 모습보다 더 초라하고 그리하여 부끄러웠다. 이들을 뽑은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역할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국민을 위한다는 말이 대관절 성립할 수나 있겠는가.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1,175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1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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