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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요한 Mar 15. 2022

어쩌다? 공무원

"말이 씨가 된다." 2017년 5월 청년정책과장으로 출근했다. 

세 번째 공이 내 앞에까지 온 것이다.
내 손에 들어온 공이 고무공이 아니라 유리공처럼 느껴졌다. 

 “김박사는 정책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고, 청년들과도 자주 소통하니 적임자이지 않느냐? 자문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일을 해보는 것이......” 주위의 권유가 이어졌다. 처음엔 웃으며 가볍게 들었다. 그런데 깊이 생각을 해보니, 내 손에 들어온 공이 고무공이 아니라 유리공처럼 느껴졌다. 피하면 훗날 후배 세대들에게 내 인생이 부끄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상의하고 최종 결심을 하였다. 
  청년 소통 및 청년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위해 2017년 1월 대구시의 청년정책과가 신설되면서 과장 보직을 '개방형 직위'로 지정하였다. 2번의 공모를 진행하였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지역 언론에서 '세 번째 외부 임용 공모'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당시 필자는 (재)대구테크노파크 정책기획단에서 13년째 근무를 하고 있었고, 대구시 청년센터 운영위원, 대구시 청년정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청년정책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세 번째 공이 내 앞에까지 온 것이다. 정년이 보장된 공공기관을 그만두고, 최장 5년(3+2년)의 계약직으로 가는 선택을 아내는 못내 불안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해주고 이해해준 아내가 고맙다. 2017년 5월 청년정책과장으로 임용되었다. 청년들 표현대로 어쩌다? 공무원, '어공'이 된 셈이다. 그동안 천직으로 여겼고, 즐겁게 일하였기에 사표를 내자 직장에서는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고, 시청에서도 오랬동안 파견근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91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자유로운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고, 사고하는 인간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유순하는 장편소설 『91학번(1992)』에서 당대의 대학생들을 불안과 불확실함으로 조명했다. 나 자신이 그 시대의 한 중간에 있었으며, 불안과 불확실한 시간을 통과했음을 서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91학번 청년은 여전히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확신에 차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자유로운 청춘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 대구시민의 약속 장소인 ‘제일서적’에서 우연히 마주한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이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는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80년대를 캠퍼스에서 보낸 60년대 출생의 시대적 자기 고백이자, 반성이며, 자기 합리화이기도 하다. 386세대의 ‘젊은날의 초상’이었다.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91학번의 잔치도 그렇게 진부해졌다. 운동보다는 공부를, 운동가를 따르기보다는 휴머니스트를 더 좋아했다.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나의 캠퍼스 생활도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1990년대의 캠퍼스는 이른바 ‘X세대’로 점령되었다.

  1995년 어느 날 학생회 선배가 묻는다. “너는 기성세대가 되면 어떻게 살래?” 학생회보다는 동아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 노동 운동가 선배의 심기가 느껴졌다. 그때 나는 무심코 “다음 세대, 청년들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최소한 두 명의 청년이라도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마흔이 넘어서야 “말이 씨가 된다.”라는 옛 선인들의 지혜가 오래된 기억을 소환했다. 


  군 복무 신병시절이었다. “화장실에서 몰래 보는 경제칼럼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교수님께 쓴 편지 한 통은 제대 이후 ‘국제경제관계연구회’라는 학술동아리 창립으로 이어졌다. 교수님과의 만남은 또 ‘청년의 삶과 꿈’이란 교양과목 개설로 연결되었다. 유명 인사나 석학을 초청해서 청년들에게 삶과 직업에 관해 이야기하는 특강 위주의 수업으로 포스코(POSCO)의 후원으로 만들었다. 조교 역할을 하면서, 학생들의 리포트를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주제가 ‘청년의 삶과 꿈’이었다. 많은 학생들의 리포트에서 1990년에 개봉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가 등장했다. 로빈 월리엄스가 연기한 ‘존 키팅’ 선생은 첫 시간부터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며 파격적인 수업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오 캡틴! 마이 캡틴!’으로 부르며 따른다. 학생들은 모두 내 인생의 ‘캡틴’을 만나고 싶어 했다. 영화 중 명대사가 많았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거라.
바보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 간에."

  2011년 11월 작은 공간에서 열 명 남짓한 청년들과 도란도란 모임이 열렸다. 서른아홉 겨울, 그렇게 ‘청년의 삶과 꿈’을 위한 길은 예고 없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대구테크노파크에서 정책기획업무를 하면서, 교수님들로부터 종종 강연 요청을 받아 지역대학에서 특강을 했었다. 그해 여름 주말로 기억된다. ‘YLC(Young Leader's Club)’이라는 대학생 단체를 위한 특강을 우연히 하게 되었다. 내가 몸담은 조직에 단장으로 파견 나와 계셨던 교수님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대신 특강을 하게 된 것이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참석한 학생들이라 더 적극적이었던 모양이다. 특강을 마치고 많은 학생들로부터 애프터(After) 모임 신청을 받았다. 그날 이후,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맥주 한잔, 커피 한잔, 몇 번을 그렇게 만났다. “선배님! 우리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계속 만나면 좋겠습니다!” 한 청년의 목소리였지만, 모두들 눈빛과 몸짓으로 이별을 아쉬워했다.  
  간절함은 '우연'도 '필연'으로 바꾸어 놓았다. 도란도란 소모임은 ‘WEsdom 인생학교’라는 비영리 단체로 성장하여 1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WEsdom’은 ‘We(우리)’와 ‘Wisdom(지혜)’를 합쳐서 비튼 표현이다. 공동체를 위한 유익과 인재를 의미한다.


# 사진출처

1. 죽은 시인의 사회,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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