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친구의 달리기가 만든 버킷리스트

당일치기 제주도 달리기 여행/제주

by 막시

막 출근해 사무실 의자에 앉으려는 찰나 카톡 알람 소리가 울렸다. 철학적인 달리기 친구 홍시기가 보냈다. "제주에 도착해서 이제 달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라."

제주도를 달릴 그를 생각하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2017년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홍시기는 신년을 맞아 여느 때와 같이 가슴 뛰는 계획을 하나 말했다. "올해 제주도를 한 바퀴 달리려고 해. 한 번에 도는 건 아니고 구간을 나눠 몇 번 뛰려고."

심장이 쿵쾅댔다.

제주도 한 바퀴 달리기는 러너라면 누구나 꿈꿔볼 만한 계획이었다. "와, 그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진짜 멋진 계획이네요. 일정만 맞으면 저도 한 번은 함께 뛰고 싶어요."

"그래? 그럼 달리기 좋은 날로 일정을 잡아보자. 함께 달리면 나도 좋지."

그날 이후 제주도 달리기는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수시로 생각났다.

그의 제주도 한 바퀴 달리기가 막 시작됐다. 그와 함께 달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 힘이 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다 좋은 생각이 났다. 카카오톡으로 편의점 도시락을 보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카톡이 울렸다. “와우, 고맙다. 잘 먹을게."

흐뭇했다.

함께 뛰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라도 친구와 함께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친구는 제주도 풍경 사진을 몇 장 보냈다. 사진 한 장의 힘이 대단했다. 사진 속의 그가 너무 부러워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함께하고 싶었다.

겨울은 멀리 떠나고 봄이 한창 기세를 올렸다. 제주도 한 바퀴를 달리는 달리기 친구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5월이나 6월 초에 제주도에 갈 생각인데 시간 되니? 이번에는 너랑 올레랑 함께 달리고 싶은데 시간 한번 맞춰보자."

”당연히 되지요."

드디어 제주도를 달릴 날이 찾아온 것이다. 5월 31일을 디데이로 정했다. 오월의 마지막 날은 여행과 달리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 제주는 러너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달릴 구간과 여행 일정은 이미 홍식기의 머릿속에 있었다. “로봇 스퀘어에서 출발해서 성산 일출봉까지 달릴 계획이야. 대략 30km인데 달리기엔 더없이 좋을 거야."

30km가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풀코스를 완주하는 러너에게 무리는 아니다. 그 이후에 그가 쏟아 낸 계획은 마치 우리 뇌 속을 한 번 스캔한 듯 완벽했다. 우리는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제주로 떠나는 날 새벽 세 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어른이 되어도 노는 날엔 누가 깨우지 않아도 기가 막히게 일어난다. 새벽길은 막힘이 없었고 잠시 뒤 우리는 올레네 주차장에서 모였다. 새벽바람은 지나칠 정도로 싱그럽고 상쾌했다.

홍시기의 차에 타면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만큼 익숙한 음악이 흐른다. 신나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했고 조용한 노래가 흐르면 제주에서 무엇을 할지 떠들어댔다. ‘달리기, 수영, 성산 일출봉 트레킹, 제주 흑돼지 두루치기와 막걸리,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 사우나', 생각할수록 완벽했다.

신나는 시간이 늘 그렇듯 순식간에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탔다. 로봇 스퀘어에 가까워질수록 여행 계획은 구체화됐다.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기 친구들이 함께 있는 로봇스퀘어는 유토피아로 향하는 출발지다. 김녕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월정리,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를 거쳐 성산 오조리까지 이어지는 해맞이 해안로는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며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명소다.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올레는 먹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첫발을 떼면서부터 저녁 메뉴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죠?"

점심 메뉴가 돼지고기라 자연스럽게 회로 정리됐고 홍시기는 제주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했다.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혹시 말이야, 맛있으면서 현지인이 찾는 횟집 좀 알려줄래? 가능하면 공항 근처로."

통화를 듣던 우리는 입맛을 다셨다. 전화를 끊은 홍시기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가 스마트폰으로 식당을 검색하는 동안 머리 셋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블로그에는 칭찬 일색이었다. 여행지에 친한 지인이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축복이다.


조금씩 달리기에 몰입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만에 해수욕장을 만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온이 올랐고 적당한 달리기로 몸에선 땀이 났다. 수영할 조건이 완성됐다.

물 만난 우리는 장난기 가득한 어린이가 됐다. 운동화와 상의를 모래사장 위 아무렇게나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래사장에서는 누가 빨리 달리나 경주했다. 셋의 속도는 달랐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힘차게 달리고 점프하며 함께 웃었다. 해수욕장 개장 전이라 발자국은 모조리 우리의 흔적이었다. 연인끼리 왔다면 분명히 하트를 그리고 각자의 이름을 그 안에 썼을 테지만 우리는 하트 대신 발자국만 최대한 많이 남겼다.

달리기와 수영이 동시에 가능한 러닝 타이즈 하나만 입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하고 멋지기도 했다. 홍시기가 말했다. "달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자"

좋은 아이디어라며 한 명씩 돌아가며 영상을 찍었다. 영상을 보며 서로의 러닝 자세를 품평했는데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었다. 역시 우린 우정에 눈먼 자들이다.

전력 질주와 점프를 번갈아 했더니 힘이 빠졌다. 이제 여행 시작인데 벌써 이렇게 에너지를 소모해도 되나 싶었다. 나와 올레가 동시에 말했다. "홍시기형, 너무 고맙소."

여행지에서 달리다 보면 멈추고 싶은 순간이 생긴다. 숨이 찬 게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다. 바다를 향해 우뚝 솟은 현무암이 우리를 세웠다. 마음속 내면 아이가 그곳으로 달려가 바위 위에 오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있었다면 "위험하니 올라가면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했을 상황이다. 잔소리할 엄마가 없으니 그곳으로 뛰어가는 건 당연했다. 노란 풀꽃 사이로 난 오솔길이 바위로 안내했다. 친구들과 나란히 달리는 순간 우리는 개선장군이 됐다. 바위 위에 올라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기쁨을 누렸다.

앉아서 풍경을 즐기는 사이 자전거 두 대가 굴러왔다. 텐트를 싣고 제주 한 바퀴를 여행했다는 지인이 떠올랐다. 나도 언젠가는 제주 한 바퀴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아직 제주 한 바퀴 달리기 여행도 못 했는데,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식당으로 곧장 가기에는 거리가 멀어 어디서든 일단 간단히 먹기로 했다. 예외 없는 머피의 법칙이 발동했다. 카페나 편의점이 나타날 기미가 없었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처럼 편의점에 대한 기대를 놓을 수 없었다. 갈증으로 막 쓰러질 때가 돼서야 무언가 보였다. 시골 느낌 물씬 나는 간이식당이었다. 쏜살같이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맥주를 짚으려는 찰나 우도 막걸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이다 막걸리와 사이다를 하나씩 꺼냈다. "맥주 말고 막사 어때요?"

"뭔들"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잔을 채우고 건배를 했다. "제주 여행과 우리들의 우정을 위하여"

씩 웃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원래 맛있을 제주 막사는 갈증에 더해 최고의 음료수가 됐다. 한잔만 하자고 했는데 마침 막걸리와 사이다가 조금 남았다. 그것을 핑계로 한잔 더 만들었다.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제주 흑돼지 두루치기의 부름을 외면할 순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달렸다. 막사의 힘인지 흑돼지 두루치기의 힘인지 알 수 없으나 다리에 힘이 차올랐다. 성산초등학교를 지나자 홍시기는 식당을 가리키며 앞장섰다. 식당에 들어서자 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복, 오징어, 흑돼지가 한데 어우러진 두루치기에 감탄사가 절로 났다. “와, 끝내주네요. 이 좋은 식당을 어떻게 알았어요?”

올레 형과 나의 아낌없는 칭찬에 친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하는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

최고의 메뉴였다. 두 친구가 먹는 모습은 홈쇼핑의 쇼핑 호스트가 먹는 모습 그대로였다. 음식은 순식간에 동났다. 맥주 세 병도 훔쳐 갔다.


달리기엔 배가 너무 불렀다. 소화를 시킬 겸 설렁설렁 걸었다. 성산 일출봉은 제주의 명소답게 관광객들로 붐볐고 그곳에서 바라본 제주 풍경은 엄지척이 백 개라도 모자랐다.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리 찍어도 실제보다 멋지지 않았다. 사람의 눈이 렌즈를 이기는 순간이다.

미국 애리조나 앤털로프 캐니언에 갔을 때 윈도 바탕화면에서 자주 봤던 사암 협곡은 장관 그 자체였다. 컴퓨터로 봐도 멋지지만, 실제로 보니 차원이 달랐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시간과 정성을 다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진은 실제보다 멋지지 않았다. 사람의 눈보다 뛰어난 렌즈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산 일출봉에서 바다와 제주를 내려다보며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내 눈보다 멋진 사진은 없었다. 그래도 워낙 풍경이 멋져 대충 찍어도 그림이었다.

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배가 무거웠다. 역시 달리기 전에 과식은 금지다. 걷기로 작정했다. 성산 일출봉의 풍경을 느끼며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흑돼지 삼합 두루치기는 최고였다. 성산 일출봉에 와 본 적은 있냐? 누구와 왔냐? 뭐 했냐? 성산 일출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많은 사람은 평일에 일 안 하고 어떻게 왔을까?”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이 정상에 도착했다. 각자 개성에 따른 감탄사가 이어졌다. “캬”, “정말 환상적이구먼”, “어마어마하네”


성산 일출봉을 내려가자 광치기 해변이 우리를 맞았다. 해변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은 엽서에 나올법한 풍경이다. “이런 곳을 이제야 오다니, 이때까지 뭘 하며 산 건지….”

국내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감탄사가 나오는 풍경을 만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본 여행지는 고작 10%도 안 될 것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여행지가 많이 남았다는 건 그만큼 갈 곳이 많이 남았다는 뜻도 된다.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선 한 커플이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었다. 미소가 살포시 났다.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보길 바랐다.

광치기 해변을 지나 만난 섭지코지는 십 년쯤 전에 아내와 태교 여행으로 처음 왔던 곳이다. 섭지코지는 자연 풍경을 자랑하지만,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로 더 유명하다. 신혼이라서 그랬을까? 여기저기 다니며 드라마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따라 했다. 닭살 행각.

거기서 달리기를 멈췄다. 30km를 넘게 달렸고 시간도 적당했다. 시작이 중요한 것처럼 마지막도 중요하다. 섭지코지는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할 만큼 멋지다.


택시를 타고 식당에서 가까운 목욕탕으로 갔다. 종일 달리고 수영을 했으니 우리 몸에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땀과 소금.

마음에 남은 흔적은 화석으로 보관하고 몸에 남은 흔적은 깨끗이 씻기로 했다. 목욕탕에 들어가자마자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로 소금기를 씻어냈다. 세상에 이런 상쾌함은 다시없을 것 같았다. 그냥 여행했다면 단순히 즐거웠겠지만 뿌듯함이 밀려온 건 우리가 제대로 달렸기 때문이다. 달리기 여행만의 매력이다. 새삼 고마워 친구를 바라보며 웃었더니 그도 웃으며 물었다. “왜?”

"좋아서요."

허기가 찾아와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식당에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기다리는 사람을 가로질러 예약석에 앉으며 기분이 좋았다. 고등어회와 잡어회를 기다리는 사이 제주도 한라산 소주를 먼저 마셨다. 소주에 무슨 맛 차이가 있겠냐 싶지만 제주에서 마시는 한라산은 지극히 색다르다. 회와 술이 화합을 하는 동안 흥과 취가 무르익었다.

시간이 흐르며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이 찾아왔다. 홍시기가 한마디 했다. “아차, 우리 제주 와서 아직 커피를 못 마셨다. 술이냐? 커피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돌아가야 하니 이쯤에서 술도 깰 겸 제주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용두암 카페촌 앞 바닷가는 고기잡이배들의 불빛과 일렁이는 파도, 수시로 나타나는 비행기로 특별한 풍경을 선사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넋 놓고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새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가왔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친구가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우리 커피를 안 마셨네”

커피를 마시려고 카페촌에 갔는데 정작 카페는 가지 않고 풍경만 봤다. 왜 그랬는지 마땅한 이유가 없어 입을 모았다. “술이 그런 건 아니야. 풍경에 취해 그런 거야.”

홍시기 얼굴에 머문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달리기 여행이 즐거워서? 우리의 행복한 모습이 뿌듯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이유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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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됐을 때 친구는 제주도 한 바퀴 달리기를 마쳤다. 당일치기 달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때론 1박 2일, 한 번은 2박 3일 여행도 했다. 가끔은 제주 한 바퀴 대신 한라산 트레킹도 했다. 제주 한 바퀴 달리기가 목적이었지만 온전한 여행도 한 것이다.

제주도 달리기 한 바퀴를 끝낸 어느 날 말했다. "제주도 한 바퀴를 달린 것만 날짜로 따지면 7일쯤 걸렸어. 너희 둘과 함께 해서 즐겁고 고마웠어. 시간을 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 그래서 더 그렇겠지? 제주도 달리기는 아마 쉽게 잊지 못할 거야. 어쩌면 평생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평생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말에 여행도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여행이 나에게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지만,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밤낮없이 버킷리스트가 될 여행을 생각했다. 어느 날 '가족과 함께 한 달 유럽 여행'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누군가는 1년 세계여행을 꿈꾸고 실현하기도 하지만 나에겐 한 달도 대단한 버킷리스트였다. 비용과 시간도 문제였지만 한 달 휴가를 낼 용기가 더 필요했다.

친구의 제주도 달리기 한 바퀴가 만든 버킷리스트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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