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늘 만나는 친구가 찐 친구

명품 호캉스 달리기 여행/서울

by 막시

한강에서 멀지 않은 어느 5성급 호텔에 체크인하는 순간, 몇 년 전 난생처음 이용한 라스베이거스 5성급 호텔이 떠올랐다. 5성급 호텔 치고는 이상하리만치 저렴했다. 직원들은 친절했고 객실은 멋졌다. 가방을 던지자마자 호텔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천 쪼가리 두 개만 걸친 미녀들을 맘껏 보며 감탄했다. 이곳이 지상낙원이구나!

달콤함의 끝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라스베이거스를 구경하고 싶어 서둘러 수영을 끝냈다. 호텔 밖으로 나가는 순간 반짝이는 슬롯머신에 마음을 뺏겼다. 100달러 지폐로 전투를 개시했지만, 순식간에 0달러가 됐다. 얼굴은 일그러지며 달아올랐다. 호텔에 체크인한 지 겨우 1시간, 슬롯머신에 앉는지는 1분이 되기 전에 하루치 호텔 가격을 빼앗겼다. 기계를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입으로만 "1818 " 구시렁대며 일어났다.

세상에는 싸고 좋은 건 없었다.

카지노 호텔이 호텔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건 손님들의 호주머니를 털려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걸 주머니가 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라스베이거스 생각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객실 문을 열었다. 특유의 진한 향기가 우리를 맞이했고 하얀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와 함께였다면 번쩍 들어 침대 위로 던졌을 테지만, 내 옆에는 시커먼 남자 둘이 있었다.

셋은 얼마 전 광화문 어느 식당에서 만났다. 술을 몇 잔 마셔 적당히 기분이 좋아졌을 때 홍시기가 말했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의미 있고 행복한 여행을 너희들과 함께 만들고 싶다." 여행경비를 대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상에서 진지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워할 그가 말을 꺼냈으니 여행은 기정 사실화됐다. 옆에 있던 올레가 판을 키웠다. "에이, 형이 혼자 그 돈을 다 내면 되겠어요? 나도 내야죠."

나도 돈 낸다고 할까? 머뭇거리는 사이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막시가 여행 계획을 짜는 거로 하자."

집에 오는 길에 어린 시절 친구들이 생각났다. 고향을 떠나 산 지 십 년이 넘어가면서 고향 친구들과 뜸해졌다. 친한 친구는 늘 고향 친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 친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떨어져 살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고 시간이 누적되면서 생각과 취향의 폭이 벌어진 탓이다. 반대로 달리기 친구들은 가까이 살고 좋아하는 달리기를 함께 하니 더 닮아갔다. 달리기 친구들이 고마우면서 고향 친구들에겐 아쉽고 미안했다.


출근하자마자 홍시기가 편지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어제 잘 들어갔니? 여행은 말이 나왔을 때 해야 해. 안 그러면 돈이 아까워지거든."

사무실에 돌아와 편지를 뜯었다. ”열심히 산 나 자신에게 1년에 하루쯤은 선물하고 싶다. 아쉽게도 아직 제대로 된 선물을 하지 못했다.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거다. 올레와 막시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최고의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씨 하나 보낸다. 함께 할 날을 기다리는 이 순간부터 이미 최고의 날이 시작된 것 같아 행복하구나."

감동했다.

편지 내용도 좋았지만 감동한 이유는 '불씨 하나' 덕분이다. 편지에서 말하는 불씨는 돈이다. 여행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몇 주 뒤 금요일 퇴근 후부터 1박 2일 여행이 확정됐다. 돈의 힘을 애써 무시하곤 하지만 무언가를 쉽고 빠르게 이뤄내는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두 친구가 베푼 충분한 자금 덕분에 여행의 주제를 <한강에서 누리는 명품 호캉스 달리기 여행>으로 정했다. 여행지를 한강으로 계획한 건 한강이 러너들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야경과 일출은 한강이 덤으로 줄 선물이었다.

여행을 계획할 때 유난히 떠오른 여행이 있었다. 처음 한강을 여행지로 삼은 십여 년 전 가족여행이었다. 대구에 살고 있던 나는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처음 한강을 만났다. 드라마나 광고에 한 번씩 등장하는 곳이라 꼭 가보고 싶었다. 강으로 늘어진 수양버들과 400년이 더 된 느티나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돛단배는 특별한 기대를 자극했다.

대체로 여행은 기대를 충족시키지만, 그날은 유난히 심한 무더위 때문이었는지, 두물머리만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다행히 걸음마를 갓 시작한 딸의 웃음으로 행복했고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여행은 여행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이 한참 지났지만 웃으며 손뼉 치던 딸의 재롱은 여전히 선명하다.


홍시기와 나는 저녁 6시가 되자마자 지하철역으로 달렸다. 금요일은 원래 발걸음이 가볍지만, 그날은 하체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흡사 <고스트 바스터즈>에 등장하는 유령이 된 느낌이었다. 잠시 뒤 우리 셋은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어느 재즈 바에서 스테이크를 썰었다. 아름다운 재즈 선율에 맞춰 흥얼거리며 와인을 마셨다. 얼굴에 연신 미소가 머무른 대신 입에 들어간 스테이크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좌우에 있던 외국인 커플 덕분에 뉴욕이나 파리의 어느 레스토랑에 있는 착각이 들었다.

남자 셋이 와인을 마시며 스테이크를 먹는 것은 익숙지 않은 경험이었다. 서울에서 십 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촌놈 기질이 있다. 이런 곳에는 반드시 여자와 함께 와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와인이 어색함을 사라지게 했고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재즈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웨이터에게 부탁해 우정 사진을 찍고 각자의 여행 소감을 말하는 사이 와인이 동났다. 술을 즐기는 남자 셋에게 와인 한 병은 부족하다. 와인을 하나 더 주문했다. 술이 늘 그렇듯 와인은 흥을 더 돋웠고 우정 게이지는 점점 더 올라갔다.

한강 변의 야경 명소 몇 곳에 전화했지만, 예약은 커녕 지금 오면 언제 테이블에 앉을지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야경을 못 본다는 생각에 아쉬웠지만, 호텔 라운지에서 야경을 보기로 마음을 바꾸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이 찾아왔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대한민국과 우루과이의 축구 평가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택시 운전사가 알려줬다. 덕분에 전혀 계획되지 않은 즉석 일정이 추가됐다. 상대 팀이 약팀이었다면 패스했겠지만, 우루과이는 그해 러시아 월드컵 8강에 진출했고 카바니와 수아레스를 보유한 축구 강국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읽은 택시 운전사는 속도를 높였다.

여행 콘셉트가 명품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텔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호텔 냉장고에 있는 물건에 손댄 적이 없었다. VIP가 된 기분이었다.

때맞춰 황의조 선수가 선제골을 넣었다. 우리가 황 선수를 칭찬하는 사이 우루과이 선수가 한 골을 넣었다. 우리는 즉각 벤투 감독과 수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대표팀을 씹어댔는데, 입이 닫히기도 전에 정우영 선수가 추가 골을 넣었다. 욕이 다시 칭찬이 되는 데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선수들을 향한 천국과 지옥의 평가를 쏟아 냈더니 목이 탔다. 갈증을 없애는 건 맥주의 몫이었다. 대표팀의 승리가 우리가 온몸 응원이라 여겼다.


스카이라운지 메뉴판에 있는 술의 가격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알던 위스키 가격에 0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

짧은 정적이 흐르는 사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여기요, 이 와인 주세요."

아무리 명품으로 위장한 여행이었지만 0 하나가 더 붙은 위스키를 주문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와인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꼭 위스키를 먹어야 하냐? 우리가 언제부터 위스키를 먹었다고? 우린 소주로도 늘 즐거웠잖아."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을 기다리는 사이 눈은 자연스레 바깥으로 향했다. 기대한 리버뷰는 아니었지만, 서울의 밤이 뿜어내는 스카이라인은 멋있었다.

와인은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코르크도 없이 달려 나왔고 우리는 서둘러 잔을 채우며 화답했다. 우정은 취할수록 좋지만, 술은 취할수록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딱 한 병만 먹기로 하고 부족한 건 분위기와 우정으로 채우자고 했다. 대화를 안주 삼아 와인을 마시며 조금씩 서울의 밤에 녹아들었다.

눈 뜨고 5분 만에 한강으로 내달렸다. 우정 여행에 딱히 단장할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다. 서울의 새벽은 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서울의 밤은 오만 가지 소리로 시끄럽지만, 새벽은 새소리 하나 없다. 우리는 서울의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자 한강이 맞이하는 첫 관광객이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잠수교를 건넜다. 평소에는 길이지만, 비가 많이 오면 모습을 감추며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린다. 마치 신비한 능력을 갖춘 영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작대교로 향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달리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그중에는 외국인도 있었고 우리와 같이 사는 서울 시민도 있었다. 하나같이 밝은 모습으로 새벽을 깨운 사람들이었다.

동작대교 구름카페에선 한강을 조망할 수 있다. 한강의 새벽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했다. "캬, 좋구먼.", "이런 곳이 있는지 어째 이제야 알았을까?", "한강 멋지네", ”이런 곳이 있는 줄 알았다면 차라리 어제저녁에 이곳에 왔을 것을"

이곳이 서울이니 다음에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거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무리 풍경이 아름다워도 식욕보다 급한 건 없다. 일출이 끝나자마자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이럴 때 달리기는 정말 유용하다. 눈 깜짝할 사이 호텔에 도착했다.

조식을 먹으면서 마음도 같이 부풀었다. 음식이 아닌 달리기 덕분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달리기가 얼마나 큰 성취감을 주는지 달려보면 안다.

“좋은 건 그냥 하면 된다. 앞으로도 종종 함께 여행하고 함께 달리자”

친구의 말에 우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정식 조식이 아닌 약식 카페테리아였지만 5성급 호텔은 간편 조식조차 특별했다. 10km 이상 달려 배고팠던 우리는 모든 음식을 다 먹어 치울 기세였다.


수영을 마치고 사우나에서 연예인을 만났다. 연예인들의 삶이 궁금하면서도 마냥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익명성 속에 숨어 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본질적 욕망도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할 테니까. 목욕탕에서는 더 그러지 않을까? 그 생각에 미치자 평범한 나로 살아가는 내 삶이 더 만족스러웠다.

남자 셋이 목욕탕에 들어가 달리기와 수영으로 뻐근해진 근육을 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화는 주제를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서로의 몸을 바라보며 탄탄한 근육에 감탄하기도 하고 러너임에도 어쩔 수 없는 배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데도 여전히 튀어나온 배는 도대체 어쩌란 건가?"

"하하하"


남은 여행을 하러 백화점으로 걸었다. 따뜻한 가을 햇볕을 맞으며 걷는 시간도 좋았다.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스포츠 매장으로 돌진했다.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입을 바람막이를 살 생각이었다. 첫 번째 매장에는 없었다. 두 번째 매장에도 없었다. 세 번째 매장에도 없었다. 그제야 우리가 찾는 바람막이가 이미 철수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역시나 의류업체의 시간은 계절보다 한 박자 빨랐다.

만장일치로 자동차 키홀더를 사자고 했다. 나중에 가격을 본 아내가 미쳤다고 했지만, 여행을 추억하는 상징이 됐다.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난 요즘도 키홀더를 보면 지난 여행이 떠올라 흐뭇해진다.

식당가로 향했다. 전날 저녁과 아침 모두 서양식 요리를 먹었더니 한국 음식이 한없이 그리웠다. 우린 그런 사람이라 평양냉면과 만두, 돼지 수육과 소주를 주문했다. 가장 한국다운 음식과 술을 마시며 말했다. "역시 한국 음식이 최고야", ”술은 낮술이 최고지", "술은 역시 소주지"


소주를 핑계로 택시를 탔다. 집이 가까워 한 차로 움직였다. 여행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완벽한 여행은 두 친구 덕분이었다.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을까? 혹시 친한 친구 한 명 없이 외로운 사람으로 사는 건 아닐까? 옆에 있는 달리기 친구들이 더 고마워졌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는데 잠 대신 고향 친구들이 찾아왔다. 멀어지는 고향 친구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다.

'친구와 포도주는 오랠수록 좋다'라고 한 영국 속담과 달리, 현실은 달리기 친구가 더 좋다. 가끔은 고향 친구와의 우정은 영원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 시대만 해도 기대수명이 30대였고 몇십 년 전만 해도 60대였다. 그때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 봤자 우정을 꽃피우기에 남은 삶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눈 고향 친구가 가장 좋은 친구였을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80세가 넘었고 앞으로 더 길어질 것이다.

오늘 새로운 친구를 만나도 우정을 꽃피울 시간은 충분하다. 오늘 만나는 친구가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옛 친구보다 더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향 친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오랜 친구니까.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에게 전화하기로 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자주 연락하면 우정은 이어질 테니까. 오랜 친구가 좋다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고 잠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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