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장 행복한 날은?

캠핑과 달리기의 콜라보/유명산

by 막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불편한 말을 늘어놓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모든 요일이 주말 같습니다. 주말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인생에서 주말만 소중한가요? 더 많은 평일은 버려도 그만인가요? 그건 본인에게 죄를 짓는 거예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셔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혼잣말했다. "그 좋은 일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주말을 기다리겠소."

나는 강사와 다르다. ‘우리의 소원은 토일’이라고 외치는 사람이다. 매일 놀면서는 살아도 매일 일하면서는 못 산다.

가끔 특별한 주말을 계획한다. 금요일 밤에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오전 내내 방바닥과 씨름하는 것보다 즐겁다. 주말을 기다리는 설렘도 더 커진다.

이번 여행을 계획한 사람은 캠핑을 즐기는 올레다. 그가 "주말에 시간 되면 캠핑 가서 달리기 한 번 하자.”라고 했을 때 쌍수를 들었다.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한 친구는 홍시기다. 1박 2일 캠핑 달리기 여행이 정해졌다. 두 친구가 먼저 출발하고 나는 금요일 퇴근 후 합류하기로 했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하루는 일주일만큼 길었다. 5시 59분 59초를 지나 초침이 12를 통과하는 순간, 나는 총알처럼 박차고 일어섰다.

경의 중앙선 아신역까지 가면 홍시기가 마중 나오기로 했다. 1시간 30분쯤 걸려 아신역에 도착했다. 먼저 나온 홍시기를 보고 물었다. “벌써 와 있었어요? 고마워요."

”5분쯤 전에 왔어.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래? 친구끼리"

역시 고마운 친구다. 친구의 차를 타고 가며 언제 도착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캠핑장에 있는 친구는 무엇을 하는지, 궁금증을 하나하나 물었다. "점심 먹고 집을 나왔어. 같이 만나서 시장을 보고 여기 와서 텐트를 치고 요리할 준비를 마쳤더니 벌써 네가 올 시간이 된 거야. 시간이 금방 가더라고. 올레는 한창 고기를 굽고 있을걸…."

캠핑은 준비된 여행이 아닌 준비하는 여행이다. 캠핑하는 사람은 준비하는 재미로 캠핑한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고기가 다 익었을 거야."라고 친구가 말한 순간 고마움은 달아나고 허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입에선 침이 고이고 배에선 소리를 질렀다.

온종일 멈춘 듯한 시간은 홍시기를 만난 순간부터 총알같이 흘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하는 사이 유명산에 도착했다. 빨리 고기를 먹고 싶었다. 주차장에서 캠핑장까지 뛰어갔다. 헐레벌떡거리며 고기를 굽는 올레에게 말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숨도 쉬지 않고 뛰어왔어요."

셋이서 한바탕 껄껄 웃으며 올레와 하이파이브했다.

자리에 앉는 순간 올레는 큼지막한 목살 한 점과 소주를 내 앞에 놓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역시!"

건배를 하고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캬~ 쥑이네!"

목살을 소금에 찍어 입에 넣었다. 고기는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풍경과 곤충과 계곡이 만드는 소리에 어우러졌다. 황홀했다. 한 주 동안 쌓였던 피로는 씻은 듯 사라졌다.


캠핑과 음악은 잘 어울린다. 올레는 내가 모르는 노래를 틀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이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가 생각났다.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다. 가을 감성이 피부를 뚫는 듯했다.

특별한 시즌이면 어딜 가나 들리는 노래가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봄에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이 그렇다. 스포티파이나 멜론 같은 음악 어플에서 노래가 재생될 때마다 가수는 돈을 번다. 크리스마스에 머라이어 캐리가 버는 돈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가수가 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제일 못하는 것이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없지만, 94년 부른 노래로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돈을 추수하는 그녀가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총알처럼 흐른 시간은 어느 때보다 빨리 새벽을 배달했다. 아쉬운 마음은 지구만큼 무거웠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 밤늦게까지 고기를 먹은 덕에 아침 식사는 달린 후에 하기로 했다.

등산로를 따라 달렸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소나무, 삼나무, 노송나무는 우리에게 힘찬 기운을 전했다. 물소리, 새소리, 곤충 소리가 한 데 어울린 자연의 음악이 들렸다. 콸콸 흐르는 계곡에는 1급수에만 산다는 중태기가 놀았다. 친구가 중태기를 가리켰다. "중태기의 어원을 아니?"

"글쎄요…."

"중이 먹다가 너무 맛없어서 패대기쳤다고 중태기야."

"푸하하하하"

농담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중태기의 맛이 어떨지는 확실했다. 고기를 먹기 힘든 스님조차 맛없어서 버렸을 정도면 말 다 했다. 1급수에 사는 깨끗한 물고기지만 누가 먹어봤다거나 식용으로 쓰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맛이 없는 건 자기를 위한 생존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맛있었다면 진작에 사라졌을 것이다.


산은 높아질수록 원시림에 가까워졌다. 너럭바위와 솟은 나무는 영화 <아바타>를 생각나게 했다. 실제 <아바타>의 촬영 장소는 중국의 장가계다. 유명산을 장가계에 비유하는 건 비약이지만, 여행하다 보면 인상 깊은 풍경이 계기가 되어 추억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많다. 샘 워싱턴과 조 샐다나가 주연한 <아바타>는 여전히 생애 최고의 영화다. 영화 속 제이크 설리가 네이티리에게 한 대사 "I see you"가 귓가에 울렸다. 영화에서 'I see you'는 단순히 너를 본다는 뜻이 아니다. 공감과 사랑이 함께 녹아 있다. 어쩌면 친구들과 함께 여행 달리기를 하는 지금, 친구들에게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아바타>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내 앞에서 달리는 두 친구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I see you”


유명산 계곡은 유난히 수량이 풍부하고 소리가 경쾌했다. 계곡을 따라 걷거나 달리고 싶다면 유명산이 안성맞춤이다. 피톤치드를 마시며 달리면 온몸에 독소가 빠져야 정상인데 힘이 빠지고 호흡이 빨라졌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트레일 러닝은 로드 러닝보다 한 수 위다.

시원한 계곡물에 세수하고 싶은 찰나, 거대한 마당바위가 만든 선녀탕이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났다. 선녀탕에서 세수하고 너럭바위에 앉아 쉬었다. "옛날 옛적에 나무꾼은 몹시 나쁜 놈이에요. 성희롱 성추행에 온갖 나쁜 짓은 다 했어요."

세상을 살다 보면 뒤늦게 잘못을 깨닫는 경우도 생긴다. 선녀와 나무꾼도 그랬다. 나무꾼이 나쁜 놈이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 옛적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다니던 시절에는 효자라서 하늘이 선녀를 내려보냈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다들 그랬다. 이젠 아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게 되어 다행이다.

어느 산이든 정상 앞은 가파르다. 유명산도 마찬가지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빨라졌다. 홍시기가 7년 전 유명산에 오른 경험을 이야기했다. "예전에 여기 왔을 때 정상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있었어. 그때 <메로나>를 먹었는데 오늘은 뭘 팔지 기대되네."

유명산에서 펼쳐질 장관과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기대하며 거친 호흡을 마다하지 않았다. 몇 분 뒤 정상에 도착했다. "캬, 좋다"라는 말이 튀어나와야 정상인데 “정상이 뭐 이래? "가 튀어나왔다.

실망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정상 표지석이 떡하니 있었다. 정상은 정상인데, 내가 기대한 그 정상은 단연코 아니었다. 날이 흐린 탓에 시야는 내 마음만큼 흐렸다. '날씨가 다 한다'는 말은 여행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등산도 달리기도 트레일 러닝도 마찬가지다.

아이스크림 상자를 발견한 홍시기가 달렸다. 무슨 아이스크림이 있을지 기대했다. 나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아이스크림 ‘비비빅’이었다. 사장님이 어디에선가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아이스크림 하나는 2천 원이었다. 슈퍼에 가면 5백 원이니 대략 1,500원을 남겼다. 여기까지 아이스크림을 갖고 왔을 사장님의 수고를 생각하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잎 베어 먹으며 물었다. "사장님. 아이스크림 여기까지 들고 오세요?"

"에이, 아니죠. 저기 패러글라이딩 하는데 보이죠? 저기까지 차가 와요."

'에잇….' 속은 느낌이었다.

아이스크림 맛은 나를 속이지 않았다. 코흘리개 시절에 먹던 맛 그대로였다. 기대한 정상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아이스크림으로 달랬다.

일어서는 찰나 한 무리의 등산객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유난히 친절한 홍시기가 당연한 듯 스마트폰을 받았다. “서로 간격을 조금 벌리면 더 잘 나올 것 같아요. 좀 웃어보세요. 하나 둘 셋”

그들 중 한 명이 100대 명산 인증 수건을 펼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산악인은 모두 가족 아닙니까? 하하하."

러닝복에 러닝화를 신은 우리를 산악인이라고 불러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슬기로운 사회생활 법칙을 뇌에 정확히 장착한 사람들이다. 마치 답변을 준비한 듯 말했다. "예, 가족 맞지요."

사진을 찍은 친구가 말을 이었다. "100대 명산 도전 중이신가 봐요? 대단하세요."

"예, 어쩌다 보니 하고 있네요. 재미도 있고 할 만하기도 하네요."

"멋지십니다. 100대 명산 모두 안전하게 등정하길 응원할게요."

100대 명산을 등정하기 위해서 매주 한 번 산을 오르면 2년이 걸리고 한 달에 한 번 오르면 8년이 넘게 걸린다. 쉬운 도전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없는 도전이기에 매력적이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다.


내려갈 때는 지름길을 택했다. 올라올 때 힘을 많이 써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친구가 말했다. "등산할 때는 반드시 내려올 때 쓸 힘을 남겨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려올 때 발목을 삐거나 넘어져 크게 다칠 수도 있어. 핸드폰 배터리도 신경 써야 해. 산에서는 언제든 비상 상황을 맞을 수 있거든. 등산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돼. 꼭 명심해"

힘을 남겨두라는 말을 가슴에 새겼다. 달리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 결승선까지 가면 끝이다. 젖 먹을 힘까지 짜낸다. 그 이후엔 쓰러져도 괜찮다. 경기가 끝나니까. 등산은 내려와야 끝난다고? 달리기와 등산의 차이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등산로의 끝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무대에 있어야 할 미인이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토요일 오전 유명산에서 우리를 아는 사람이 나타날 리 없었다. 예쁜 여자가 우리를 보고 웃을 리는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녀는 내 생각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냥하고 밝게 웃으며 가까이 왔다. '완전히 맛이 갔군'이라고 생각한 순간, 우리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해졌다. 그녀를 1미터 앞에 두고서야 누군지 알게 됐다. 그녀는 같은 러닝 클럽의 회원이었다. "와,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이 시간에 그것도 여기서 만납니까?"

"호호호, 그렇게 말이에요. 정말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군요."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에 나올법한 일이었다. 이런 기이한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일어났다.

2006년 신혼여행 가던 날 인천공항 면세점 앞에서 어디선가 본 사람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있는 여자의 헤어스타일을 보니 그도 신혼여행 가는 느낌이었다. 그와 가까워진 순간 군대 후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전역하고 6년 만에 신혼여행 가는 공항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특별한 뭔가 있었을 거라고 기대하면 오산이다.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군대 인연이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다. 가우디 가이드 투어의 미팅 장소인 까사 바트요에 다다랐을 때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 떠올랐다. 설마 했지만 가까워질수록 짐작은 확신이 됐다. 직장 후배였다. 그는 아내와 여행 중이었다.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한국에 돌아와 막걸리를 마셨다.

지금까지 세 번의 놀라운 만남이 모두 여행 속에서 이루어졌다. 여행은 놀라운 마법사다.

어젯밤 적당히 취한 우리는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와 '끼리릭' 귀뚜라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다음 달리기 여행을 계획했다. 나는 몽골에 가서 별 헤는 밤 달리기를 하자고 했고 올레는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수영을 하자고 했다. 홍시기는 어디든 좋다고 했다.

내 마음은 인도로 기울었다. 셋 모두에게 낯선 인도는 특유의 신비로움이 매력적이다. 얼마 전 투자자로 유명한 짐 로저스의 책을 읽었다. 그는 평생 한 번만 여행한다면 인도를 가겠다고 했다. 친구의 말에 그가 생각났고 인도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인도의 갠지스강에 가면 한쪽에는 시체가 떠다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수영한다고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인도에 가서 시체를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갠지스강에서 수영은 꼭 하고 싶다. 갠지스강을 따라 달리고도 싶다. 나무 타는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는 인도 여행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였다.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는 사이 캠프장 정리가 마무리됐다.

24시간도 안 되는 짧은 1박 2일이었지만 세상 어떤 여행보다 강렬했다. 나중에 일어날 행복을 미리 그렸던 순간이 좋았다.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가장 행복한 날은 행복한 오늘이 아니라 행복한 내일을 품은 오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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