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느린 달리기가 만드는 작은 기적

해외여행 가서 달리기 대회 참가하기/런던

by 막시

친구가 마음에 심은 버킷리스트를 추수하기로 했다. 방문할 도시를 먼저 정하고 항공권을 예약했다. 사람들은 입출국 도시를 정하는 데 꽤 오래 고민한다고 했는데, 러너인 나는 쉬웠다. 유럽 여행 첫 번째 주말에 런던마라톤이 열릴 예정이었고 그것은 러너에게 빼놓을 수 없는 빅 이벤트였다. 대회 신청을 못해 달리지는 못하지만, 응원과 관람만으로도 멋진 경험이 될 게 뻔했다.

런던마라톤 참가를 못하는 대신 하이드파크에서 열리는 동네 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대회 당일 일찌감치 공원에 가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기로 했다. 축구공은 공원 근처에서 살 생각이었는데 머피의 법칙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여덟 개의 눈이 이쪽저쪽 사방을 뒤졌으나 상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이드파크는 축구공이 없는 우리의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때 영국 왕실이었던 하이드파크는 축구를 즐기기에 최상의 조건이었다. 아들은 버스에서 내리면서부터 축구공을 사달라고 노래했다.


푸르디푸른 잔디밭을 밟는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얘들아, 물통으로 축구 하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앞에서 물통을 찼다. 높이 솟구친 물통은 내 머리 뒤로 날아갔다. 바람에 물통이 제멋대로 날아간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보가 터져 그칠 줄 몰랐다.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를 하며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물통과 오줌통의 공통점은 차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날아간다는 것이다.

곧 대회 출전을 앞둔 나는 달리기도 전에 나가떨어졌지만, 아이들은 지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만하자고 졸라대다 방법을 바꾸었다. "얘들아, 배고프지? 저기 앞에 있는 식당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서둘러 식당으로 가는 아이들을 뒤따르며 흐뭇해졌다.

공원 안에 있는 서펜타인 카페에서 피자와 피쉬앤칩스를 주문했다. 호기심으로 주문한 음식을 가족 모두가 좋아했다. 누군가는 피쉬앤칩스가 맛없다고 했지만, 음식은 내 입맛에만 맞으면 그만이다.

런던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찾느라 끙끙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유럽 여행을 3개월 앞둔 어느 날, 런던마라톤이 생각났다. 바로 홈페이지에 접속했지만 대회 신청 기간은 끝난 뒤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라톤 대회 전문 여행사에 연락했다. 그들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런던에도 서울처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매주 열리는 마라톤 대회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찾아낸 홈페이지가 <www.runthrough.co.uk>다. 영어를 잘했다면 좀 더 쉽게 대회를 찾았겠지만, 이 홈페이지를 발견하는데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운도 따랐다.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나오자 아내가 한마디 했다. "꼭 런던까지 와서 그런 민망한 타이즈를 입어야 해?"

당연하다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보기에는 민망한 타이즈지만 입어보면 편리함을 포기할 수 없다. 허벅지 쓸림이 심한 나는 더 그렇다.


대회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어떻게 달릴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가끔 대회 당일조차 어떻게 달릴지 결심하지 못하는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빨리 달리라는 이성과 천천히 달리라는 감성이 줄다리기를 했다. 한치의 양보도 없던 승부는 조금씩 감성으로 기울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하이드파크의 풍경과 함께 달리는 러너를 보기로 했다.

출발시간을 20분쯤 남기고 아내에게 말했다. "잘 달리고 올게. 30분 정도 걸릴 거야."

대회장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그럴듯한 대회 분위기를 냈다. 대회 참가자들 모두 나와 비슷한 옷차림이었는데 유독 나만 추위에 떨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수영을 하는 외국인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체온이 나보다 10도는 낮은 외계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하이드 파크에서도 그랬다.


한국에서 10km 종목을 신청했는데 현장에서 5km로 바꿨다. 현장에서 종목을 변경하는 건 작은 대회의 장점이다. 주최측의 융통성과 배려가 있어야 가능하지만.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러너들이 앞 다투어 튀어 나갔다. 나는 그들 무리에서 벗어나 적당한 속도로 시작했다.

5백 미터쯤 지났을 때 나는 거의 꼴찌에서 달렸다.

유일한 한국인인 내게 국가대표의 자존심이 찾아왔다. 천천히 달리겠다는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급격히 가속하며 앞서가는 선수들을 무더기로 따라잡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앞에 무리 지어 달리는 사람들이 없었다. 백 미터를 달려 한 명, 다시 이백 미터를 뛰어 한 명, 숨넘어가게 달려야 한 명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를 추월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동네 대회라서 그랬겠지만, 호랑이가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죽을 둥 살 둥 달린 이유가 더 컸다. 3km 정도 지난 시점부터는 내 앞에 달리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입상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호랑이 옆에 사자가 한 마리 더 붙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달리는 여성 러너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30미터, 좁혀지는가 싶더니 다시 벌어지는 상황이 몇 번 반복됐다.

남자의 자존심이 발동했다. 으라차차차, 다시 으라차차차.

그녀를 추월했다. 내심 기분이 좋았으나 여자를 이긴 거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내 뒤에 몇 명이나 따라오나 보는 척 돌아봤다. 20대 초반밖에 안 돼 보였다. 강인한 얼굴에서 대성할 재능이 보였다.

골인 지점까지는 1km도 남지 않았다. 심장이 터진다고 아우성쳤지만 더 펌프질 하라고 외쳤다. 내 앞에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젖 먹는 힘까지 짰지만, 순위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미 결승선에 들어온 사람이 다섯 명은 더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부터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결승선에 있었다면 아들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이다. 아쉬운 생각에 투덜댔다. “에잇, 아직까지 뭐 하는 거야. 좀 미리 나오지…."

대회 관계자가 ’Hyde Park’라고 새겨진 완주 메달을 목에 걸어주었다. 축하 인사와 웃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런던마라톤은 아니지만, 런던에서 열린 대회에서 완주했다는 보람을 느꼈다. 최선을 다한 뿌듯함도 느꼈다.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카페로 걸었다. 가족들이 보였다. 아들은 달려왔고 아내와 딸은 천천히 걸었다. 아들을 안아 들고 뒤이어 아내와 딸을 만났다. 아내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벌써 들어왔어? 몇 분 만에 들어온 거야? 이렇게 빨리 들어올 줄 몰랐어.”

갓 전역한 사람에게 벌써 전역했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달리는 나는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데 벌써 라니?'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여행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미리 좀 나와 기다리지, 들어온 지가 언젠데…."

완주 메달을 목에 건 채 아이들을 양쪽에 안고 환하게 웃었다.

빨리 달리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면 어떤 경험을 했을까? 빨리 달리며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꼈지만, 여유를 누리지는 못했다. 성취감과 여유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과한 욕심이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유럽에서 달리는 동안은 여유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거나 현지인 러너와 함께 교감하는 달리기 말이다. 여행하다 보면 수시로 현지인과 함께 달린다. 러너를 만나면 동료 의식이 생기며 순식간에 마음의 무장이 해제돼서 그렇다.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와 LA 중간쯤에 있는 산 루이스 오비스포에서 하루 머물렀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일어났다. 러닝복으로 갈아입고 호텔 근처에 있는 <라구나 레이크파크>로 향했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턱수염을 기른 채 두건을 쓴 미국 산적이 내 앞을 지났다. 무식해서 용감한 나는 이런저런 생각도 하지 않고 불쑥 말을 걸었다. "Sir, laguna lake park?"

그 와중에 검은색 송아지가 나를 가로질러 그의 옆에 앉았다. 입마개도 하지 않은 셰퍼드였다. 괜히 물어봤다는 후회가 밀려올 즈음, 산적이 생긴 것과 달리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Are you running?"

좋은 소식 기대돼 힘주어 대답했다. “Yes!”

산적은 순식간에 달리기 친구가 됐고 셰퍼드는 호위견이 됐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 두 명과 개 한 마리는 인종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듯 나란히 달렸다. 그는 달리기에 딱 좋은 트레일 러닝 코스로 나를 안내했다. 얼마나 많은 러너가 오르내렸는지 광이 날 것 같았다.

호흡이 편해지자 말이 많아졌다. 그는 아침마다 달린다고 했다. 본인은 달리기를 좋아하고 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문을 연 나는 한국인, 특히 아저씨라면 빠뜨리지 않을 질문부터 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데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여지없이 호구조사부터 한다. "How old are you?"

"35"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내 또래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다시 보니 제 나이로 보이고 귀엽기도 했다.

그는 어땠을까? 한국 사람은 보통 내 나이를 다섯 살 쯤은 많게 보는데 그는 내 나이보다 한 살 어리게 봤다. 내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어릴 때는 한 살이라도 많아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고작 한 살 어리게 봤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한 시간쯤 달렸을 때 그는 출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오늘이 평일이고 내가 여행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지막 배려를 잊지 않고 호수로 내려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나는 어느새 셰퍼드와도 정이 들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청년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긴 했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서로의 삶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랐다.


여행을 마친 훗날 누군가 물었다. "그가 진짜 산적이었다면, 셰퍼드가 물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따라갔냐?"

러너에 대한 믿음이 강한 나는 말했다. “우리 둘 다 티셔츠에 러닝 팬티만 입고 있어 그럴 리는 애초에 없었어. 다시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내 선택에는 변함이 없을 거야.”

지금도 러너에 대한 믿음은 변함없지만, 개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개는 입마개를 해야 한다. 우리 개는 애완견이라 물지 않지만, 남에게는 남의 개이고 남의 개는 언제든 물 수 있으니까.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다.

그제 아침에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를 열연한 라미 말렉을 닮은 청년과 함께 달렸다. 그는 내가 리센츠 파크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이다. 달리고 있는 그를 따라가 러닝 코스를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다. 얼마나 뛸 거냐고 묻기에 10km 정도 뛸 거라고 했다. 자기는 5km 정도 달릴 건데 같이 뛰겠냐고 물었다.

“Of course”

수염 없는 라미 말렉과 함께 아름다운 리센츠 파크를 달리기 시작했다. 약간 왜소한 체격인 그는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 이야기를 하며 나를 놀라게 했다. 달리기 9년 차인 나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고작 3년 차인 그가 그걸 해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도 출신인 그는 10년 전에 영국으로 유학 와 런던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금융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질문은 질문으로 돌아왔다. 런던에는 어떻게 왔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 중이라고 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그도 결혼해서 아빠가 되고 싶어 했다.

브리튼 드림을 이룬 인도 청년은 중국과 일본에는 가봤지만, 한국에는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언제든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는 '어떻게 연락해?'라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달리는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facebook?"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함께 30분 정도 달린 후 그는 작별을 고했다. 서로의 핸드폰을 꺼내 페이스북 친구 맺기를 하고 사진도 한 장씩 찍었다. 인도에서 꿈을 찾아 런던으로 온 그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를 만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페이스북에서 그의 글을 발견하면 좋아요를 누르거나 간단한 인사말을 남긴다.

누군가와 함께 달리면 급격히 친해진다. 굵은 호흡을 쏟아내며 함께 달리면 마음의 벽이 얼음 녹듯 사라진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전적으로 나의 경험이다. 나는 이것을 달리기가 만드는 작은 기적이라 생각한다. 작은 기적은 천천히 달릴 때만 누릴 수 있다. 빨리 달릴 때는 나에게 집중하니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산루이스 오비스포와 런던에서 외국인 청년들과 달리며 멋진 추억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천천히 달린 덕분이다.

풀코스 달리기는 빨리 달릴 수 없어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작은 기적을 누릴 확률이 높아진다. 러너가 장거리 달리기를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은 런던 마라톤을 참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더 키웠다. 그래 봤자 소용없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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