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댄스 VS 달리기
달리기가 아니어도 괜찮아/파리
러너로 살아가는 해가 쌓일수록 달리기를 편애했다. 혼자 즐길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운동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터널에 들어서면 출구 밖만 보고 주변은 살피지 못하는 것처럼 달리기만 보고 다른 운동을 폄훼했다. 달리기는 잘못이 없다. 다른 운동을 애써 무시하는 내가 잘못이다. 누구나 생각의 틀을 깨기 쉽지 않다. 다행히 계기가 내게 찾아왔다. 그것도 파리에서.
샤요궁은 에펠탑을 바라보고 있다. 인생 사진을 남기려는 마음으로 각종 오두방정을 떨었다. 목적을 달성하고 에펠탑으로 걸었다. 에펠탑 최상층 전망대에 오를 생각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멀리서 들리던 작은 음악 소리는 점점 신나는 댄스곡으로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에펠탑이 정면으로 보이는 무대에서 댄스 버스킹이 펼쳐지고 있었다. 300여 명의 관광객이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한 자리씩 차지했다.
댄스 공연이 끝나자 공연팀의 리더는 관객들을 향해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소통하며 관객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 아시아의 차례가 됐고 중국 다음으로 코리아를 불렀다. "Anyone from Korea?"
아이들이 없었다면 잠자코 있었을 텐데, 아빠인 나는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용기를 끌어모았다. 손을 들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왜 가만히 있냐고 물을 게 뻔했다. 한국에서 온 사람이 우리 가족만은 아니었는데 손을 든 사람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공연팀 리더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국말을 하는 공연팀이 신기했고 우리나라의 위상도 느껴졌다. 리더가 나를 지목하더니 뭐라고 했다. 난데없는 우리말에 흐뭇해하느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깨닫지 못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시선을 느낀 순간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게 됐다. “Hey Korean, Come here please"
옆에 있던 아이들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은 조금씩 통제를 벗어났다. 아이들에게 늘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라고 말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막 입사했을 무렵 박신양, 김정은, 이동건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파리의 연인>은 최고 57%, 평균 41%라는 거짓말 같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박신양과 이동건은 수많은 여심을 홀렸다.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 하냐고!>, <아기야, 가자!>, <이 안에 너 있다> 같은 빛나는 어록을 탄생시켰다.
박신양이 연인 김정은에게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남자인 나도 멋졌으니 여자들이야 오죽했으랴? 대한민국 모든 여자가 박신양에게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신양은 엘지패션의 브랜드 ‘마에스트로’의 광고 모델이었다. 그가 입은 옷을 입으면 나도 멋질 거라는 기대로 그 옷을 샀다. 삼사십 대 브랜드를 선호하는 희한한 이십 대 청년이었다. 마흔이 넘은 요즘은 다시 마음이 바뀌어 십 대나 이십 대가 선호하는 브랜드를 산다. 희한한 중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대는 한결같이 빗나간다.
<파리의 연인>은 파리에 대한 동경을 심었다. 그때부터 에펠탑은 반드시 봐야 할 곳이 됐고 달리기를 시작한 후 센강은 꼭 달려야 할 곳이 됐다.
드라마가 끝나고 15년이 지나서야 파리를 만났다. 누구에게는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나에게는 무척 별것인 파리 방문이었다. 무엇이든 마음에서 놓지만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입증됐다. 달리기처럼!
파리에 있는 동안 일어나면 어김없이 달리기부터 했다. 첫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 퐁피두 센터와 파리 시청사를 지났다. 곧바로 바리케이드 앞에 선 경찰을 만났다. 그들은 일반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있었다.
바리케이드 좌측에 노트르담 성당이 있었다. 여전히 통제되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을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센 강을 건넜다. 센 강을 사이에 두고 노트르담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파리에 오기 2주 전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소식은 한국에서도 실시간 방송됐다. 프랑스와 크게 상관없는 안타까웠다.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 소식에 남대문 화재가 떠올랐다. 국보라고 화재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보 1호의 화재는 충격이었다. 화재 원인은 토지 보상에 불만을 가진 사람의 방화였고 남대문은 너무나 쉽게 불탔다. 화재를 일으킨 사람의 뇌 구조가 궁금했다. 죄의 중함으로는 평생 감옥에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도 국민은 상실감을 보상받지 못한다.
국가는 아무 잘못이 없는 것일까? 국보 1호를 그렇게 쉽게 손댈 수 있게 만든 일차적인 책임은 국가에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나라라면 국가의 보물을 제대로 지켜야 하지 않을까? 국가가 역할과 책임을 못 할 때 피해와 자괴감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프랑스 국민이 느끼는 상실감은 우리 국민이 남대문 화재 때 받은 그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꼽추 콰지모도가 죽은 에스메랄다를 껴안고 부르는 <춤을 춰요, 나의 에스메랄다>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슬퍼하던 콰지모도에게서 노트르담 성당을 잃은 파리 시민의 얼굴이 겹쳐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낮이었다면 북적이는 여행자들 틈에서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다. 새벽의 고요가 노트르담 성당으로 상처 입은 파리 시민의 슬픔을 나에게 전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목적지로 정하고 센 강을 따라 달렸다. 전날 저녁 디너 크루즈를 타며 즐거웠던 기억이 살아났다. 노트르담 성당으로 우울해진 마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TV나 극장에서 영상으로만 봤던 루브르 박물관을 처음 마주한 나는 두근댔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피라미드가 나타났다. 피라미드는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고 그것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나만의 CF 영상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피라미드를 CF에 넣고 싶었다. 혼자 왔으니 촬영을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 삼각대 같은 촬영 장비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지형지물을 활용하기로 했다. 계단에 스마트폰을 거치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모델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구도와 배경이 멋져 훌륭한 사진과 영상이 됐다.
열 번 넘게 피라미드를 뺑뺑이 한 결과다. 우리가 보는 백조는 우아하지만, 물속에 있는 다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물질한다. 나의 노력은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촬영 후 내가 보는 건 무엇인가? 뺑뺑이가 아니라 멋진 사진과 영상뿐이다. 나의 각종 생쇼를 본 사람이나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여행 때마다 새벽 시간을 열심히 활용한다.
파리 시민들은 루브르의 피라미드 건설을 반대했다고 한다. 피라미드가 프랑스 고전 르네상스와 루브르 박물관의 역사와 맞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파리 박람회 기념으로 에펠탑을 만들 때 흉물스러운 고철 덩어리를 건립한다고 반대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는 그들의 조상은 혹시 투덜이 스머프?
인생 사진을 찍은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다시 뛰었다. 숙소에서 나올 때는 에펠탑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발걸음은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에투알 개선문으로 향했다.
센강 건너에는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바뀐 오르세 미술관이 보였다.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밀레, 마네, 모네 등 이름은 특이하지만, 그들이 그린 그림은 하나같이 세계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카루젤 개선문(역사 시간에 배운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을 통과하자 탁 트인 튈르리 정원이 나타났다. 공원이라기엔 아기자기하고 섬세했다. 정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풍경이었다. 초록 잔디를 지나자 발길을 멈추게 하는 연못이 나타났고 주위에는 여행자를 위한 의자가 연출처럼 놓여있었다. 군데군데 설치된 조각상들은 이곳이 예술의 도시 파리임을 일깨웠고 마로니에와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은 달리기를 푸르게 했다.
튈르리 정원은 유서 깊은 콩코르드 광장과 이어진다. 1770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결혼했는데, 23년 뒤 같은 장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물론 프랑스 국민에게도 불행한 역사다.
역사는 유유히 흘러 피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곳에는 테니스 세계 4대 메이저 대회인 롤랑가로스(파리 오픈) 홍보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콩코르드 광장은 여전히 의미 있는 장소로 존재감을 보였다.
여행 기간에 프랑스오픈이 열렸다면 한 경기쯤은 관람했을 테지만, 대회는 여행이 끝난 뒤에 열릴 계획이었다. 롤랑가로스 관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콩코르드 광장을 몇 바퀴 돌았다. 축구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버킷리스트가 챔피언스리그나 월드컵 관람인 것처럼 테니스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는 롤랑가로스 관람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정현 선수나 권순우 선수가 롤랑가로스에서 우승하는 날이 오길 바랐다. 수영의 박태환, 야구의 류현진, 피겨의 김연아, 축구의 손흥민이 나왔으니 이제 테니스에도 누군가가 나올 때가 됐다.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개선문까지 달리는 건 다음 날로 미뤘다. 대신 가족들과 저녁에 갈 재즈 바 <Caveau de la Huchette>의 위치를 확인하기로 했다. <Caveau de la Huchette>는 영화 <라라랜드>에 잠깐 등장해 라라랜드 재즈바로 불린다. 구글맵으로 확인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경우 나는 현지인에게 묻는다. 내 앞을 지나가는 파리지앵을 멈춰 세웠다. 인사를 하고 구글맵이 켜진 스마트폰을 내밀자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로 설명했다. 어깨를 으쓱했더니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가 돌아왔다. 여전히 난감한 표정을 짓자 따라오라고 했다. 귀에 쏙 들어왔다.
길을 가면서도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를 했고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는 나는 예스와 노를 반씩 섞어 대답했다.
몇십 보 걷기도 전에 그는 재즈 바 앞에 멈췄다. 프랑스인은 영어를 알아도 모른 체한다는 편견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옆집 아저씨 같은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파리지앵의 친절사례를 하나 더 말하고 싶다. 우박이 쏟아지던 날 파리 생제르맹과 니스의 축구 경기를 관람하러 갔다. 티켓을 출력해가지 않아 경기장 앞에서 만난 구단 관계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부탁했다. 그는 옅은 미소를 품은 채 우리 가족을 티켓 교환소로 안내하고 우리가 티켓을 교환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좌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재미있게 보라는 말까지 빼먹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친절은 어느 나라 누구보다 친절했고 나는 프랑스인의 친절에 만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편견은 이미 사라졌어야 할 고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의 변화는 과거 1백 년간 이루어진 변화보다 더 빠르다는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하다.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그를 다시 만났다. 나는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고마움을 전해야 할 사람에게 줄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그를 다시 보자마자 불러 세웠고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이 들어간 손톱깎이를 건넸다. 그는 자신의 친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선물에 활짝 웃었다. 나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시 댄스 버스킹 이야기다.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는 것을 거기 있는 전 세계인들이 알았고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코리안은 용기 없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기도 싫었다. 꼭 그럴 때만 없던 애국심이 튀어나온다. 맥박은 수치를 급격히 높여 달릴 때 최고 수준인 180 bpm을 넘었다.
무대에 오르자 리더가 인사말과 간단한 질문을 했다. 내가 방심한 사이 나의 심장을 날뛰게 했다. "Shall we dance?"
300명은 훨씬 넘어 보이는 사람 앞에서 러너의 심장과 다리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찰나의 순간, 막춤밖에 모르는 나 대신 방송 댄스와 줌바 댄스를 배우는 아내가 나왔다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하얘지는 순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렀고 그들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노래였고 자주 따라 했던 춤이다.
그냥 말처럼 흔들었다.
음악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상궤도를 벗어났던 맥박도 제자리를 찾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는 춤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대중 앞에서 달리기는 익숙하지만 댄스는 낯선 나는 일생일대의 큰일을 치렀다. 문득 나와 반대인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는 힘들고 재미없다고 말하며 줌바 댄스와 방송 댄스를 즐기는 아내의 얼굴을 보니 확신이 생겼다.
운동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게 됐다. 춤이 운동이 될 거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대중 앞에서 직접 춤을 춰보니 달리기보다 더 심장이 뛰고 다리가 풀렸다. 마흔이 넘어서야 춤도 운동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달리기에 관한 아내의 말과 태도도 이해됐다. 내가 춤출 마음이 없듯이 아내가 달릴 마음이 없는 건 당연했다.
이제는 아내의 줌바 댄스와 방송 댄스를 운동으로 응원한다. 마라톤 대회 때는 함께 달리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함께 달리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나는 달리고 아내는 춤춘다.
같은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불편함이 사라졌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운동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진작 알았다면 더 좋았겠으나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