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도착한 당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야경을 보러 미켈란젤로 광장에 갔다. 광장에서 내려다본 노을은 감탄사를 자아냈다.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노을은 다시 물감이 되어 아르노강을 따라 흘러내렸다. 붉은빛 강물은 7백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베키오 다리를 지나며 아름다운 피렌체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아르노강 너머에 우뚝 솟은 지붕은 하나같이 붉은색 옷으로 단장하고, 누가 제일 아름다운지 경연을 펼치는 것 같았다. 베키오 궁전, 피렌체 두오모, 산타크로체 성당은 미인대회의 진선미처럼 두드러졌다. 여행을 주제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 비유하면 BGM이 반드시 나오는 경치였다.
미켈란젤로 광장 가운데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상이 있다. 진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지만, 전문가가 봐도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에겐 그냥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었다.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빛이 난다. 평소에 조각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 대단한 예술품을 보고서는 가만히 있기 어렵다. 가족들과 함께 360도를 돌며 샅샅이 살펴보고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광장을 떠나기 전 학교 운동장처럼 평평한 타원형 광장을 한 바퀴 달렸다.
이성은 “한 번 왔으면 됐다. 언제 다시 피렌체에 올지 모르는데 다른 곳에도 가야지.”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틈날 때마다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을 때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성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피렌체를 방문하는 날이 오면 그때도 제일 먼저 찾을 곳은 미켈란젤로 광장일 것이다.
사람의 습관은 대단하다. 새벽 러닝이 취향인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새벽이면 자동으로 눈을 뜬다. 여행지에선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 집에서는 거실이나 다른 방에서 이것저것 할 수 있지만, 한 방에서 생활하는 여행에서 선택지는 다양하지 않다. 가족들의 잠을 방해할 수 없으니 대체로 밖으로 나가 달린다. 여행에서 새벽 달리기는 나와 가족의 시차를 메우는 방법이기도 하다.
달리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은 혼자 달리면 지루하고 심심하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다. 혼자 있는 시간이 무작정 외롭지만은 않은 인생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 달리고 싶은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의 문제는 함께 달릴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다.
피렌체에서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눈은 자동으로 떠졌다. 여유가 되면 읽을 책 한 권을 작은 여행용 크로스백에 넣었다. 전날 흐린 날씨로 못 본 일출을 반드시 보겠다는 심정으로 다시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시뇨리아 광장을 향해 달렸다. 붉은색 돔이 상징인 피렌체 두오모를 지나 시뇨리아 광장에 들어섰다. 광장을 크게 한 바퀴 달리는 동안 아직 열지 않은 카페와 웅장한 조각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은 유난히 대단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려면 여기저기 수소문해야 할 지경이었다. 뒤돌아선 나를 두고 "감히 커피에 얼음을 넣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따갑다.
광장 이곳저곳에 놓인 조각상은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감탄사를 토해내는 예술품이다. 그냥 지나치면 훗날 후회할 날이 올 것 같았다. 미켈란젤로 광장을 가다 말고 조각상을 하나하나 감상했다. 낮이 되면 시뇨리아 광장은 사람으로 미어터져 조각상 하나 제대로 찍으려면 꽤 기다려야 한다. 새벽에는 사람이 없다. 광장에서 내 눈에 띈 사람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낮과 밤을 더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여행자 여러분, 가끔은 새벽에 관광 명소를 찾으세요.”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가려면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을 건너야 한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됐고 낮이면 관광객에게 떠밀려 겨우 이동할 수 있는 베키오 다리를 건넜다. 역시나 새벽이라 인적이 드물었고 달리는 동안 겨우 두 사람을 보았다.
아르노강을 따라 달리며 강을 바라보았다. 달리면서 바라보는 아르노강은 서울의 중랑천보다 좁은 평범한 강이다. 어릴 때 물놀이하던 하천도 이보다는 넓었다. 이때가 처음 아르노강을 본 순간이었다면 하찮게 여겼겠지만 내 마음엔 이미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본,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아르노강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해서 아르노강을 따라 달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뿌듯했다.
사람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인다. 달릴 때 나와 달리지 않을 때 내가 다를 수 있다. 러너는 언제 더 멋질까? 누구보다 러너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강변을 벗어나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하는 언덕을 향했다. 내 앞에는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달리는 여성 러너가 었다. 저 여인은 관광객일까 현지인일까? 말을 걸어볼까 망설이다 그냥 지나쳤다. 아저씨가 되어 달리기를 시작해서일까? 결혼하기 전에 달렸다면 한 번 정도는 말을 걸어보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를 추월했다. 계단을 제법 올랐을 때 뒤를 돌아봤다. 여성 러너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쯤에서 피렌체의 풍경을 한번 보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녀는 힘들어서인지 걷고 있었다. 달릴 때 그녀와 걷고 있는 그녀는 같지 않았다.
정상 쪽 계단 끝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달렸다. 심장이 터지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미켈란젤로 광장에 도착했다. 심장은 마치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쿵쾅댔다.
"여행 가시면 사진만 찍지 말고 동영상도 꼭 찍으세요. 사진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고 나중에 여행을 추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거예요." 여행이 취미라는 어느 기자가 가족들과 한 달 유럽 여행을 간다는 말에 해준 조언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동영상을 보면 다시 그곳에 있는 느낌을 받아요. 엄마와 또 여행을 떠나고 싶네요." 그녀는 어머니와 다녀온 유럽 모녀 여행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영원히 남기고 싶었다. 내가 이곳에서 건강하게 달릴 수 있어 고맙다는 말을 쉬지 않고 쏟아냈다. 딱히 누군가에게 한 말이 아니다. 그냥 그 순간이 감사했다. 신을 믿지 않지만, 이 순간 누군가 내 말을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행복한 해설자였고 영상은 가슴 뛰는 다큐멘터리가 됐다.
아르노강이 흐르는 피렌체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붉은색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새벽이나 저녁이나 한결같았다. 피렌체가 '꽃(fiore)'이라는 어원을 가진 도시라는 것을 실감했다.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취해 하늘에 가득한 구름을 뒤늦게 보게 됐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큼지막한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일출을 확신할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들은 말 걸기 어려울 만큼 진지했다. 그냥 기다리며 피렌체 풍경을 더 감상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검색하면 됐을 텐데, 그때는 그 쉬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으로 향했다. “다비드가 다윗과 골리앗의 그 다윗이라는 사실 알고 계시죠? 의외로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우피치 마술관 가이드 투어가 한 말이 생각났다.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똑같은 다비드지만 정체를 알기 전과 후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다. 다비드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미켈란젤로의 혼이 깃든 거대하고 늠름한 예술품이었지만, 정체를 알게 된 후에는 가장 용감한 소년이 되었다.
거인에 맞서 싸운 그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즈음 나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이 살아나고 있었지만,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 피렌체에서 우연히 만난 말 없는 다윗은 꿈쩍 않던 나의 용기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거인에 맞서 싸운 다윗에 비하면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이다. 열정만 있다면 시간은 러너의 편이라는 오랜 믿음을 다시 되살리며 한 걸음 더 나가기로 했다.
아직 태양이 떠오를 시간이 되지 않았다. 지난밤 아내와 버스킹을 보며 맥주를 마셨던 계단에 앉았다. 초등학생 두 남매는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피렌체에 들떠 있었다. 내 뒤에 앉은 대학생쯤 돼 보이는 여학생이 유난히 아들을 보며 웃었다. 동양에서 온 아이가 귀여웠던 걸까? 저만한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벌써 아기를 갖고 싶은 걸까? 그녀는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호의를 보였고 우리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남겨주었다. 어딜 가나 친절한 외국인으로 가득했다. 호의를 보여준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Thank you. god bless you”
가방에 넣어둔 책이 떠올랐다. 구본형 작가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를 꺼냈다. '시처럼 아름답게 살고 싶다'라는 표지 문구에 눈길이 머물렀다. 책은 구본형 작가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글을 모아 엮었다고 한다. 한 제자와 구본형 작가의 일화가 따뜻하게 살아났다. “구본형 연구소에 지원했으나 떨어졌어요. 얼마 후 스승님의 연락을 받았어요.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만났어요. 스승님이 연락한 이유는 매생이국을 사주기 위해서였어요. 팍팍한 살림살이로 매생이국을 못 먹어봤다고 지원서에 썼거든요….”
그 일화를 본 순간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구본형 작가의 인품에 탄복했다. 제자들은 그를 말과 글이 일치한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피렌체를 배경으로 책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주위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피렌체를 배경으로 책 사진을 찍었다. 책이 주인공이 되고 풍경이 배경이 되어 멋진 사진이 됐다.
책을 읽다 고요를 깨는 요란한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웨딩드레스와 예복을 입고 스냅사진을 찍는 커플이 있었다. 동양인인 그들은 내 눈에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요즘은 해외여행 다니며 스냅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요."
책 읽기를 멈추고 그들을 바라봤다. 온 얼굴에 행복이 가득해 나도 흐뭇해졌다. 웨딩 촬영을 해외에서 하는 게 유행일까? 돈이 많아서 해외로 웨딩 촬영 온 걸까? 아니면 스냅사진의 콘셉트가 웨딩 촬영일까?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구본형 작가와 책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그가 나와 함께 달리거나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여행을 떠나면 습관적으로 책을 챙긴다. 멋진 풍경 아래 책을 읽고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는다. 가끔은 책을 베개 삼아 벤치나 나무 그늘에 눕기도 하니 책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구본형 작가의 여행 캐리어 꾸리는 방법은 인상적이었다. 방법은 이렇다. 여행을 앞두고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모조리 캐리어에 던져 놓는다. 그리고 여행 전날 꼭 필요한 것만 두고 나머지는 뺀다. 그렇게 반만 채워 여행을 떠나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그곳에서 산 크고 작은 기념품과 지인을 위한 선물로 가득 채운다.
지금은 나도 그렇게 한다.
책이 달리기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좀 더 훗날이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다음 해 본격적으로 트레일 러닝에 뛰어들었는데, 그때 서울 둘레길을 홀로 완주했다. 서울 둘레길은 서울 외곽 경계선을 따라 157km 길이로 이어진다. 숲길과 하천길로 이루어져 트레일 러닝을 위한 최적의 코스다. 백팩에 로마 전성기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을 넣고 다녔다. 명상록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 아닌, 삶부터 죽음까지 인생에 관한 본인의 다짐을 쓴 일기다.
지하철을 타는 동안 읽기도 하고 달리다 힘들면 휴식을 하며 읽기도 했다. 아우렐리우스는 나의 멘토이자 달리기 친구가 되어 함께 달렸다. 그는 나에게 대체로 용기를 가끔은 위로를 주었다. 명상록을 가방에 넣고 달리면 아우렐리우스가 내 곁에 있는 착각이 든다.
명상록을 만난 후 때로는 음악이, 때로는 길이, 때로는 알림 소리만 내는 스마트 시계가 달리기 친구가 됐다. 이제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언제든 함께 달릴 수 있는 친구를 곁에 둔 러너가 됐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됐을 때는 사람 아닌 친구들, 그중에서 팟캐스트가 자주 친구가 됐다. 주로 듣는 주제는 여행과 독서인데 둘 다 친구처럼 편안하다. 쌍방향 소통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지만, 꼭 내가 말을 해야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재미있는 친구에게 듣는 것처럼 웃고 전문가에게 강의를 들을 때는 지적인 친구에게 배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북 콘서트를 하는 것처럼 귀 기울이고 다음에 종이책을 사서 읽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피렌체는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다비드가 준 용기로 나는 개인 최고 기록에 도전했다. 트레일 러닝에 뛰어들었고 서울 둘레길을 만났다. 서울 둘레길에서 운명처럼 선택한 명상록은 사람이 아닌 책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는데, 그 계기는 피렌체에서 만난 한 권의 책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덕분이다.
명상록을 선택한 이유는 피렌체의 다음 여행지인 로마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깨달음과 성과도 단 하나의 이유와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여행과 달리기 같은 경험을 통해 알았다. 경험은 경험으로 배움은 배움으로 깨달음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로 섞인다.
'천재는 나면서부터 알고 수재는 배워서 알게 되지만, 나처럼 보통 사람은 경험해서 알게 된다. 좀 늦을 수 있지만, 결과는 같다. 긴 인생을 봤을 때 조금 빠르고 늦는 건 어쩌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용에 나온 이 문구조차 나는 경험으로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