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 분수는 호텔에서 몇 번 뒹굴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다른 관광지와 달리 이른 새벽부터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역시 트레비 분수였다. 어떻게든 예뻐 보이려는 그들의 표정과 포즈에서 피식 웃음이 났다.
여행을 하기 전에는 크고 작은 계획을 한다. 숙소 정하기는 큰 계획에 속한다. 숙소를 정할 때 주요 관광지와의 접근성과 주변에 달릴 공간이 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로마에 예약한 호텔은 만점 더하기 만점이었다. 호텔에서 1km 떨어진 곳에 달리기 좋은 보르게세 공원이 있고 도보 1분 거리에 트레비 분수가 있었다.
계획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듯이 계획 없는 여행과 달리기도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늘 계획하고 준비하며 살아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삶의 발자취를 남긴다.
발자취만 있으면 삶이 밋밋하다. 향기 없는 조화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삶에 향기를 내는 것은 따로 있다. 나는 그것이 뜻밖에 찾아오는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호텔에서 1km를 달려 핀초 언덕에 도착했다. 보르게세 공원의 시작이다. 이곳에서 포폴로 광장과 성 베드로 성당을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다.
어제는 가족과 함께 야경을 보러 왔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 축구를 했다. 딸은 물론 아내도 동참했다. 어린 아들이 있는 엄마의 역할은 참으로 다양하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본인이 축구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어제 우리 옆에서 젊은 청춘 남녀들이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대학생들이 MT를 온 것 같았다.
축구를 시작하고 5분쯤 지났을 때다. 한 커플이 우리와 좀 더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밀착하며 하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자석처럼 붙어 그들 사이에는 공기가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영화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관객들은 기대감을 높이고 침을 꼴깍 삼킨다. 아이들과 함께 그 상황을 바라보며 침을 삼킬 순 없었다.
포폴로 광장과 성 베드로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갔다. 로마에서 멋진 풍경을 보니 영화 <타이타닉>에서 케이트 윈즐릿이 양팔을 벌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허리를 감싸는 명장면이 떠올랐다. 그 상황을 재연하며 사진을 찍었다. 꼴값으로 나왔다. 위치를 바꿔가며 몇 번을 더 찍었으나, 역시 꼴값이었다. 말없이 사진을 지웠다.
포폴로 광장을 향해 내려갔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그곳은 인적이 드물었다. 혼자라면 무섭겠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아내와 나는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헉…."
좌측 45도 방향 십 미터 앞에서 한 커플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키스를 하며 곧 19금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사랑이지만 초등 두 아이와 함께 여행하는 우리에겐 매우 민망한 상황이었다.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저기 앞 큰 나무까지 빨리 가는 사람에게 아빠가 선물 하나 사준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지에서 100m 달리기를 하는 가족이 됐다.
여행을 계획하는 것처럼 달릴 때도 미리 코스를 정한다. 어제는 테베레강을 따라 달리다 베드로 성당을 찍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계획대로 달렸다. 오늘은 달랐다. 보르게세 공원을 한 바퀴 달리고 돌아갈 계획을 바꿔 발길 닿는 대로 달리기로 했다. 길을 모르지만 전 세계 어디서든 구글맵만 있으면 문제 될 리 없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달리다 보르게세 미술관을 만났다. 베르니니의 조각과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어 누군가에겐 필수 여행지이겠지만, 내게는 그냥 달리다 만나는 많은 공간 중 하나일 뿐이다.
미술관을 빠져나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위대한 작가 괴테의 석상을 만났다. 베르테르, 이름만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일 것 같고 여자 이름 로테가 남자 같다. 사실은 반대다. 석상을 보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꼭 읽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여전히 읽지 않고 있다. 나의 다짐이란 대체로 이렇게 가볍다.
뜻밖의 만남은 끊임없이 나를 멈추게 했다.
조금만 뛰어도 독특한 건물과 멋진 조각상이 나타났다. 모든 건물은 로마의 유적이고 조각상을 만든 사람은 분명히 미켈란젤로일 것 같았다. 석상의 주인공은 반드시 역사책에서 한 번은 본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특이한 것을 만나면 멈췄다. 구글맵에 흔적을 남긴 수많은 구글러는 유적에 대해 상세히 알려줬다.
콜로세움으로 가다 한 번씩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그건 뜻밖의 만남을 위한 작은 시행착오였다. 테르미니역 근처 레푸블리카 광장 분수에서는 조각상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는 전라의 여신이었다. 서울이라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아예 설치되지 못했거나 철거 시위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여신을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신들을 뚫어지게 보게 됐고, 달리기 엔진을 껐는데도 심장은 쿵쾅댔다.
남의 시선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 로마인과 달리 남의 시선을 더 신경 쓰는 동양인은 잠시 뒤 다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보르게세 공원에서 3km를 달렸다. 평소대로 달렸다면 15분이면 충분했는데 40분이나 걸렸다.
반환점에 도착했다. 콜로세움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와 코모두스가 마지막 일전을 벌인 장소다.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 한국에서부터 가이드 투어를 예약했다. 예약 당일 숙소에서 콜로세움까지 온 가족이 함께 달렸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일찍 자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역시나 말을 잘 들으면 아이가 아니다. 더 자고 싶은 아들을 안고 달렸다. 잠시 뒤 아들이 깼고 약속 시간에 맞추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뛰자"
정신 차린 아들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길도 모르는데 나보다 앞서 달렸다. 아들을 불러 뒤에 따라오라 하고 나, 아들, 딸, 아내 순으로 달렸다. 우리 가족이 달리는 순서였다.
아들은 아빠 뒤에 꼭 붙어서 달렸지만, 아내와 딸은 조금씩 거리가 벌어졌다. 숨이 점점 차올랐지만, 눈앞에 나타난 콜로세움에 힘이 났다. 내 옆에 바짝 붙어 달리는 아들도 목적지를 보더니 신이 났다. 뒤로 돌아보니 딸과 아내는 반쯤 걷고 있었다. 잠시 멈춰 기다리다 함께 달려 늦지 않게 도착했다. 약속 시간 2분 전.
고작 1.5km를 달렸지만 약속 시간을 지켰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내와 아이들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들뜨고 뿌듯한 모습으로 웃었다. 뜻밖에 달린 달리기가 준 소소한 기쁨이었다.
예상치 못한 달리기와 얽힌 추억은 또 있다. 구글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오렌지 공원을 찾았다. 공원에 가는 날 아내는 원피스를 입었다. 오월이었지만 이상 저온으로 여행 내내 한 번도 입지 못한 원피스였다. 그날도 춥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숙소를 나오는데 하늘이 불안했다. 구름이 점점 많아지더니 버스에서 내릴 때쯤엔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오렌지 공원으로 걸었다. 한 방울은 바가지가 됐고 우리는 가져간 돗자리를 우산 삼아 어느 성당으로 달려 들어갔다.
식사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남부 투어 가이드가 알려줬다. "누구나 알지는 못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테이크 레스토랑이 있어요. 가성비가 로마 최고예요."
식당에 갔다. 우산이 없어 주야장천 뛰어다녔다. 비에 홀딱 젖었지만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은 무엇이든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식사하는 동안 비가 그쳤고 우리는 다시 오렌지 공원으로 향했다. 젖었던 옷은 체온과 바람에 말랐고 빛나는 하늘 사이로 쏟아진 햇살로 발걸음은 나비가 됐다. 아내는 연신 싱긍벙글했다. "하늘이 도왔네. 원피스를 입은 보람이 있어."
아이들과 장난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렌지 공원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망대로도 손색없었다. 많은 사람이 전망 풍경을 즐기며 버스킹 공연을 듣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왔다는 세 부부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부부보다 연장자처럼 보이는 세 부부와 가벼운 인사를 시작으로 폴란드와 한국, 로마와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는 사진을 찍고 서로의 언어로 인사했다. “pa”, “안녕”
탐험가처럼 내려갈 땐 올라왔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계획에 없던 로즈가든을 만났다.
몇 년 전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주연한 영화 <라라랜드>가 흥행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두 사람이 열렬히 춤을 췄던 그리피스 천문대가 가슴에 콕 박혔고 언젠가는 아내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됐다.
로즈가든을 만난 순간 <라라랜드>가 떠올랐다. 비록 이곳이 그리피스는 아니지만, 아내와 춤을 출 곳이라는 생각이 부풀었다. 주저 없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켜고 아내와 춤을 췄다. 관광객 몇 명이 마치 공연을 보듯 우리를 유심히 바라봤다. 파리에서 300명 이상 앞에서도 춤을 췄으니 고작 몇 명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딸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건 꼭 거실에 걸어야 해"
핀초 공원에서 찍었던 '꼴값'의 아쉬움을 완전히 털어냈다.
아내는 한 달 유럽 여행을 하며 원피스를 딱 한 번 입었는데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오전에는 돗자리를 쓰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만큼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있었지만, 상황은 늘 변하게 마련이고 예기치 않은 우연은 완벽한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예기치 않은 우연은 여행 마지막 날에도 찾아왔다. 체크아웃하고 호텔을 나서다 항공권을 확인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간혹 항공편 시간이 바뀌거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로마에서 파리행 경유 편이 취소됐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갔던 넋을 찾아 다시 호텔로 갔다. 프런트 매니저에게 내 항공권을 보여주며 손짓 발짓했다. 그녀는 항공사에 전화했고 우리는 초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통화를 하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내게 전해진 소식은 완벽했다. "경유 편 항공기에 문제가 생겨 직항으로 바꿔주겠다."
편안한 마음으로 직항 비행기를 탔다. 나는 책을 읽다 영화 <아쿠아맨>을 봤다. 주인공 아쿠아맨은 등대지기와 해저 도시 아틀란티스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슈퍼 히어로다. 아쿠아맨이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삼지창을 찾아야 하는데 결정적 단서가 로물루스 석상이다. 로물루스는 테베레강에 버려졌으나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마를 세운 전설적인 건국 영웅이다. 왜 하필 '로물루스'가 등장하는 영화 <아쿠아맨>을 로마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보게 됐을까?
로마 여행을 하는 내내 르네상스가 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부흥을 표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같은 거대한 건물을 볼 때마다 말도 안 되는 건축기술에 감탄했다. 로마가 대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샘솟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겠다고 다짐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진작부터 알았지만, 명상록은 달리다 뜻밖에 만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주>를 통해 알게 됐다.
아쿠아맨은 나에게 로마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준 것 같았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해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로마와 로물루스를 잊지 못하고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막시무스가 결투했던 콜로세움을 떠올린다. 로마인 이야기와 명상록은 말할 것도 없다.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 피렌체, 로마에서 여행하고 달리면서 수많은 우연이 있었다. 도시마다 발 도장을 찍으며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다시 내 머리와 가슴에 박혀 잊지 못할 여행이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행의 순간들이 조금씩 잊히겠지만, 두 발로 꾹꾹 찍어가며 새긴 여행은 디지털 파일로 저장한 것처럼 영원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에 저장된 장면은 예기치 않은 우연이다.
여행과 달리기는 움직이는 면적이 넓은 만큼 뜻밖에 찾아오는 우연을 만날 확률도 높다. 그런 이유로 여행자와 러너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삶의 만족도가 더 넓은 건 아닐까?
서울에 돌아온 후 나는 많이 걷고 달려준 두 발에게 작은 선물을 했다. 혹시라도 아프거나 불평이라도 했다면 우연이 준 소소한 행복은 아예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 달 동안 묵묵히 내 몸을 지탱해준 발이 고마웠다.
새 운동화를 신고 다시 일상 달리기를 시작했다. 여행지의 설레는 풍경은 없었지만 새 운동화가 여행과 달리기를 연착륙시키는데 도움이 됐다.
여행에서 다녀오면 또 다른 여행을 꿈꾸듯이 여행에서 달리면 다음 여행에서도 달리고 싶어 진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나는 뉴욕 여행을 꿈꾸고 센트럴파크에서 달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다비드가 준 용기 덕분에 나를 넘는 기록에 도전하고 보스턴 마라톤에도 참가할 것이다. 마음에는 있지만 애써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했던 울트라 마라톤 도전도 슬그머니 가져왔다. 이제 해야 할 건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달리는 것뿐이다.
다음 여행지에서 만날 또 다른 우연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