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그레이 애플 케이크
얼그레이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특유의 콤콤한 향, 단맛도 쓴맛도 아닌 어정쩡한 맛. 애매한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자주 가는 동네 카페 O의 쇼케이스 안에서 ‘얼그레이 레몬 케이크’라는 문구를 보게 되었다. 얼그레이와 레몬의 조합이 문득 생소하고 귀엽기도 해서 망설임 없이 덜컥 시도해 보았는데 생각 외로 ‘얼그레이와 레몬’의 만남이 꼭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그 둘의 조합을 응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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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단골 카페 K의 얼그레이 애플 케이크. 둥근 접시에 단아하게 놓여있다. 얼그레이를 우려 만든 시트 사이에 얼그레이 생크림이 도포되어 있고 그 크림들 사이를 사과 조림이 틈틈이 메우고 있다.
예전에 파이(pie) 만드는 일을 잠시 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파이를 만들었었는데 유독 내가 좋아했던 파이는 애플파이였다. 정확히는 애플파이를 만드는 과정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애플파이에 들어갈 사과를 조리는 일이 참 좋았다. 통통하고 붉은 사과의 껍질을 벗기고 얇게 슬라이스한 후 설탕과 물, 버터를 조린 냄비에 담는다. 수분이 생길 때까지 약불로 조리는데 이 시간이 되면 주방 전체에 사과 조리는 향이 가득 퍼진다. 설탕의 달큼함, 버터의 나른함, 사과의 경쾌함. 오후 세 시에만 느낄 수 있는 사과 조림의 기분 좋은 향. 여전히 가끔 그 향이 코끝을 스칠 때가 있다.
수분이 없어지지 않게, 타지 않게 잘 조려야 해서 계속 관심을 줘야만 하는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유독 관심 주는 일이 나를 보살피는 일 같아 더욱 주걱을 꽉 쥐고 사과를 휘휘 저었던 기억이 있다. 사과의 색이 아이보리에서 진한 아이스 라떼의 색으로 변하면 불을 끄고 한 김 식힌다.
그런 과정과 인내를 거친 사과들이 얼그레이 시트 안에 별처럼 박혀있다. 이빨로 자그마한 사과를 씹고 혀 전체로 크림과 시트를 누르며 그 셋의 묘한 만남을 즐겼다. 순수한 사과들이 뛰놀던 낯선 케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