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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day Jan 22. 2023

푸딩 왈츠

바나나 푸딩

푸딩 왈츠


산 능선 따라 걷다 보면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과거 이전의 일까지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과거, 그곳에서의 시간은 멈춰진 채로 빠르게 지나간다. 아득히 먼 과거를 반추할 때 나는 산 능선을 떠올린다. 나 있는 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크고 멀고 장엄한 산 능선을 바라보면, 그 선 따라 천천히 가다 보면 어느새 그리움을 매만지고 있다. 그리움이 절정에 달하면 그리움을 모르게 된다. 그리워하는 존재들로부터 나는 너무 멀리 있다. 그 간격을 견딜 수 없어 되뇐 것들이 그리움이라면 절정에 달한 그리움은 형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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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깔린 한여름, 녹색 버스를 타고 가로등이 제법 많은 동네에 왔다. 카페에서 시원한 드립 커피와 바나나 푸딩을 주문했다. 여름답게 카페 안과 밖은 시원한 소름이 가득했고 곧 테이블 위에 커피와 푸딩이 놓인다. 살짝 건드리면 강아지 꼬리처럼 살랑 흔들리는 푸딩과는 달리 이렇게 무질서로 섞인 추상적인 푸딩을 좋아한다.


바나나 푸딩을 스푼으로 섞을 때면 산 능선을 떠올린다. 고요하기만 한 마음을 괜히 들쑤시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도 든다. 마스카르포네 크림과 생크림이 섞인 새하얀 크림, 바닐라빈을 품은 노란 커스터드 크림, 바삭한 버터 과자 그리고 바나나. 그리움의 춤, 망각을 위한 춤, 그들은 부딪히고 섞이고 서로를 매만지고 할퀴고 손을 잡고 껴안고 멀어지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큼지막하게 떠먹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스푼 면적의 1/2 분량만 조금씩 떠먹었다. 크림만 먹기도 하고 바나나만 먹기도 했다. 천천히 시간과 마음을 주었다. 마치 왈츠를 감상하듯.


바나나 푸딩이지만 사실 바나나 왈츠에 가까운, 석양보다 노을에 가까운 정교하지 않은 디저트.

조그맣고 깊은 곳에 담긴 잠든 영혼들. 스푼의 깊은 다이빙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견딜 수 없음을 사랑하는 디저트, 허물어지길 바랐던 디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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