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롤케이크
추적추적 타닥타닥 부슬부슬 부스러지기 쉬운
비가 내린다.
비 내리면 우산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의 라디오를 늘어지게 듣고 싶다. 아스팔트 위 깻잎 같은 나뭇잎을 한 장 떼어 일기장에 고이 눕히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을 가장 잘 살고 싶다. 감정에 미끄러지는 부끄러운 일들도 비 오는 날 만큼은 근사한 고통이 된다. 나약한 마음을 정성스레 맞이하는.
지난번 혼자 마산에 다녀온 날. 낯선 동네의 평범한 케이크 가게를 방문했던 날. 그곳의 바닐라갸또에 감동했던 날. 그날처럼 오늘도 비가 왔다. 혼자 오지 못하고 강한 바람과 함께, 그 바람에 많이 기대서인지 다소 어설픈 얼굴이었다. 일요일과 비, 비와 커피, 커피와 책, 책과 디저트. 돌고 엮이고 순환하고 껴안고 입 맞추고 싶은 단어들의 하루. 오늘은 진한 풍미 가득한 우유롤케이크가 생각나 애정 하는 동네 카페 중 한 곳을 찾았다.
우유를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평온이다. 그를 생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백색이 주는 새하얗고 투명한, 순수하고 단아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유를 마음속에 품으면 나 자신이 제법 유유해 보인다. 우유는 내게 그런 단어였다. 장난치고 싶다가도 애틋한 마음을 갖게 하는 단어. 그런 단어가 내게 또 있다. 존중.
어느 날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존중은 할 수 있다."
이해와 존중의 간격은 '애쓰다'를 기준으로 나뉜다. 늘 이해하려 애썼기에 내 마음은 뜨거운 물속 대추알처럼 쪼그라들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하니 입은 무거워지고 몸은 둔탁해지고 얼굴엔 더러운 빗물이 가득했다. 가끔 뜨거워 불멍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존중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가만한 마음이 된다. 불멍에서 모닥불이 된다.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동자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한다. 존중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존중하기로 한 순간 이미 존중이다. 카메라 대신 눈에 담고 싶은 마음 같은 존중. 그가 가진 힘.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면, 내가 그의 옆에 나란하려면 수많은 오해와 설움 미숙함으로 뭉친 눈보라를 몇 번 더 견뎌야 할 것이다.
그렇게 미숙한 신발을 신고 눈밭을 뛰어다녔다. 어디를 가든 자꾸만 덜컹거렸다. 그러나 존중의 세계는 그마저도 허용했다. 여름 끝무렵 갑작스레 마중 나온 가을 공기처럼, 아량의 마음으로 여름을 배웅하는 아침 공기처럼, 뾰족한 포크의 발자국을 아름 안던 롤케이크. 웅크려 단단해 보이지만 그늘 바람처럼 나긋한 생크림. 그 속엔 눅진한 우유의 시간이 잠겨 있다. 비로소 채워진 시간. 우유의 날들은 웅크림의 시간이지만 또 다른 이름의 탄생이다. 화장기 하나 없이 민낯 그 자체로 예쁜 롤케이크. 그 앞에선 누구든 한 번쯤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