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갸또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곳의 대기는 후끈했지만 이따금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도 했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단조롭고, 산책이라 하기엔 시간과 목적지가 중요했기에 4시간을 달려 도착한 낯선 곳을 걷는 이 행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호했다.
가야 할 곳에 매여 있으면서도 주변 풍광을 놓치진 않았다. 짭조름한 대기와 발랄한 태양, 무척이나 소극적인 바람과 그를 재촉하는 여분의 빗줄기. 어수선함 속에서 태양의 웃음 같은 여우비가 내렸다. 희한한 날씨의 변덕을 경험하며 바다가 있는 곳을 따라 계속 걸었다. 산등성이와 물줄기 같은 고요하고 자유로운 마음을 구하면서.
월요일이었다. 비가 내렸다.
아침 일찍부터 케이크를 먹으러 카페로 향했다. 전날 그리도 더웠는데 길가의 풀과 꽃, 나무와 잡초들이 흠뻑 젖어 목덜미를 떨구고 있다. 어제의 선명한 산능성은 흐릿한 수채화가 된 지 오래. 이런 날은 마음에 돌이 들어앉은 듯 발걸음도 사부작대지 못하고 축 늘어진다. 무언가 돌에 견줄만한 '감동'이 필요했다. 탄탄한 모래성 같은 우울감을 금세 무너뜨릴 파도가 필요했다.
바닐라갸또를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바디감이 깊은 묵직한 시트, 굳건한 심장과 마음을 지닌 듯 강인하고 올곧은 자태. 쉽고 가벼운 달콤함이 아닌, 포크질을 계속하게 되는 그런 손쉬운 케이크가 아닌, 한 입 먹고 잠시 멈칫하게 되는 그런 디저트를 원했다. 무거운 갸또와 화이트가나슈, 부드러운 생크림을 차분히 떠먹었다. 빈틈이라곤 없는 시간이었다. 디저트를 먹으며 음식을 먹으며 이런 진부한 표현을 쓰는 건 원치 않는데 바닐라갸또를 맛 본 순간 말 그대로 '감동을 받았다'. 내 삶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실 일상에서 감동을 받는 일이 있을까? 감동을 받는다는 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인데, 일상과 규칙을 벗어나는 일인데, 일몰을 바라보는 마음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인데....
포크 자국이 그대로 남는다. 오래 기대 한쪽 어깨가 따뜻한 것처럼 포크의 여운이 갸또에 오래 남아있다. 갸또의 얼굴에 별처럼 퍼져있는 바닐라빈. 바닐라는 무언갈 묻고 있었다. 그 물음에 답하듯 천천히 오래 씹었다. 포크질을 멈추고 이런저런 추상화 같은 기억과 감정들에 대해 생각했다. 전날 항구에서 맡은 비릿한 바닷물 냄새와 그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태우던 모르는 남자의 뒷모습과 배차간격이 느린 버스를 기다리던 일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