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09 습작 앞, 멋있다며 웃는 아이와 침묵하는 나
________수업 준비를 하려 가방을 여는 나.
________낱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너덜너덜해진 원고들.
________가만히 보는 하늘
________클로즈업되는 빽빽하게 첨언 적힌 드라마 대본
________형광펜으로 줄 그어진 문장들에 이어진 손가락
하늘________(집어 들며) 쌤, 이게 뭐예요?
________바닥에 쏟아진 대본 줍느라 정신없는 나
________빨리 주워 감추려 하느라 듣지 못하고 허둥대는.
하늘_______쌤, 이거 다 직접 받아 적으신 거예요?
나________......
하늘_______쌤?
나________아... 으응.
하늘_______와 대박.
나________부끄럽게 뭐예요. 내놔. (휙, 가져가는)
_______얼굴 빨개진 나, 가방에 되는대로 쑤셔 넣는.
_______그런 나를 뚫어지게 보는 하늘.
하늘_______(호들갑 떨며) 쌤, 진짜 멋있어요!!!
나________(갑자기) 응?
하늘_______꿈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잖아요!!
_______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이다.
_______물끄러미 하늘 쳐다보는 나
_______나의 얼굴 위로 나의 내레이션.
나(N)____ 그 웃음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_________ 상처가 뭔지, 거절이 어떤 무게인지 아직 모르는 얼굴.
_________ 그 순수함이 고맙기도 했지만,
_________ 이상하게 마음이 저려왔다.
일주일에 한 번,
나는 작법을 공부하는 학생이 된다.
학생이 되는 날 중에서도 가장 떨리는 날.
그날은 내 작품을 합평하는 날이었다.
일주일에 5일은 생업을, 이틀은 작가지망생으로 글을 쓰고 살고 있다.
평일엔 일하고 주말에 글을 쓰는 (엄밀히 말하면 평일 하루를 쉬고 주말 하루를 일하니 주말은 아니지만) 생활을 시작했다. 그랬을 때만 해도 대학 다닐 때처럼으로 돌아가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수익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일주일에 5일 중 하루씩 줄여서 글 쓰는 날을 늘려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가슴 벅차하며 하늘을 한참 쳐다봤었던 과거를 기억한다.
일을 하며 틈틈이 쉬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조각조각 끄적끄적 모아놓았던 것들을 글로 조합하는 시간을 보냈다.
수업의 커리큘럼은 대학교에 다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한 학기에 학생 작품을 2개 합평을 하는 구성이었다. 대학생 때 많이 해보았으니, 생업을 갖고 이렇게 산지도 몇 년째이니, 대학원을 다녔으면 학위는 따고도 남았을 시간이니 괜찮은 줄 알았다.
합평시간은 피땀흘린 작품을 난도질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했으니 힘든 게 무뎌질 만도 한데 대체 왜 그렇지 않은지.
그저 내가 부족한 것이긴 하지만, 이 정도 했으면 마음이 덜 다칠 때도 됐는데.
합평 내용들이, 첨언들이 가득 적혀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기운이 없어서 얼마 못 가고 카페에 주저앉았다. 춥진 않았지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켜 테라스에 앉아 한참 눈앞의 방송국을 쳐다보았다. 들어가고, 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지만 나에게는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특정 방송국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방송국이어서.
내 대본으로는 아직 가장 바깥인 저 문의 문턱도 넘을 수가 없었다.
나도 언젠간 드라마를 방송하는 날이 있겠지.
몇 해를 쳐다보고 다짐하며 힘을 내고, 또 쳐다보고 의지를 다졌던 건물의 커다란 하늘색 심벌이 날 쳐다봤다. 여전히 말이 없다. 그 침묵이 거절인 것만 같아 더 힘이 빠졌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수업에 들어갔다.
쏟아진 원고를 보며 하늘이는 연신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내내 쳐다봐주길 바라며 봤던 방송국 건물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늘색 심벌에게 애원하며 날 좀 봐달라고 했지만 계속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내게 거절로 다가왔고, 나는 그 상태로 그 앞을 떠나왔다.
내 글은 조용히 부서졌고, 나는 그 조각들을 가방에 담아 돌아왔는데 하늘이는 그 조각들을 보면서 ‘멋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같은 것을 보고.
멋있다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라니.
오늘의 나는 그렇게 근사하지 않았는데.
그 말이 따뜻해서, 오히려 더 씁쓸했다.
발걸음을 뗄 힘도 없어 한참을 멈춰 서 있었는데.
그저, 많이 흔들렸고, 많이 작아졌고, 많이 아팠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게 웃어주었다. 멋있다면서.
그 웃음이 오래 전의 나를 닮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겠지.
그래서 더 씁쓸했다.
그 말이 따뜻해서, 더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