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연차를 낼 거라고

써본 적 없던 연차, 하루도 남김없이 긁어모아 몰아서 쓰려고요

by 는개




우울이가 곁에 있는 채로

그냥 그대로예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플 거면 지금 아프자.


부모의 부양 의무나 아이 문제,

모든 것들의 책임의 연결선이 느슨할 때.

지금의 내가 내버려 둬도 될 때.


아빠가 아프지만 내게 손을 벌리진 않고, 시부모님도 그러실 분들이 아니니까요.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는데도, 양가의 아이 독촉에 또 관습과 관념에 갇혀 나도 모르게 또 침범당하며 살고 있었어요.







우울이는 발작처럼 찾아와요.
불안과 초조를 끌고 와서 우울이는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도

아주 조그마한 자극으로도

저를 무너뜨려요


약 없이 나 혼자 버티기에도 나는 버거워서

그저 저 밑으로 내려가 눈을 감고, 귀를 막고서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잠겨있는 것이 전부예요. 귀를 타고 머리를 꽝꽝쾅쾅 울려대는 세상 돌아가는 소리들과, 눈을 쉼 없이 긁어대는, 사막의 햇빛살 같은 세상의 모습을 피해서.


그래서 잠겨있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인생에 휴가를 내려고요.


‘나’의 가치는 찾지 못했고, 자존감이라는 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 같고. 확실히 지금의 나는 자연인으로는 설 수 없어요.


글을 쓰지 못해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선택했던 생업에 종사하는 인간으로서만, ‘강사’로만 기능하며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강사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학습된 게 있으니 나 없이도 생업은 수행할 수 있으니까요.







우울이가 잠시 물러난 뒤, 우울에게 점령당해 묶여있다가 잠시 거동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몇 시간을 걸어 선생님께 갔었거든요. 근데 들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은 지나친 의존이에요. 그렇게 울며 매달리는 게 정상적인 걸까요?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태는 비정상적인 관계예요.”
그 말 이후로는 선생님께 다시 갈 수 없었어요. 저에게 트리거가 될 만한 단어를 피했을 뿐, 선생님은 날 버린 거니까요.


거부당한 사람이니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아요. 이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선생님을 찾는 건 두렵고 무서워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평소의 기분을 되찾고 싶은 마음, 그 작은 마음 하나라도 품고 싶습니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몇 년이라도 지금의 상태로 숨어있어 보려고요.
지금 내 수입만으로도 현상 유지가 가능하니까 지금 내 껍데기를 남겨놓고 숨어도 괜찮을 거예요.


상관없는 거예요.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인생에 연차를 내야겠어요.

연차는 늘 쓰지 않고 물질로 받아 생존에 썼는데 이번에는 전부 써서 휴가로.

나를 일시정지하는데 써 보려고요.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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