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 나도 모르게 오늘을 지날 수 있도록
우울은 스콜처럼 쏟아지고 사라집니다.
잠시 소강했다 다시 쏟아지고 물러났다가 주룩주룩 흐릅니다.
긍정확언이라는 걸 접하면서 필사를 시작하게 되고 한 달간 하루를 빠지지 않고 매일 했어요.
뭔가 많이 달라질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딱히 바뀐 건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거쳐온 과거에 퇴적되어 온 존재잖아요? 그렇게 쌓인 생각들에서 행동이 파생되고, 타인에게서 자신을 보호합니다. 생존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해 내는 거죠.
사람의 호의와 악의, 선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었던 과거들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아물지 못하게 된 저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예 만들어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려 노력해요. 그러기 위해 예전과 달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일정 이상 가까이 가려는 마음을 참아요. 또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선의와 호의를 보일 틈이 보이면 조금이라도 새어 나오지 않도록 온몸으로 꾹꾹 억누릅니다. 나는 해칠 마음이 있던 게 아닌데, 선의였는데, 그저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좋아서, 신나서 그랬는데 상대에게는 부담으로 다가갔던 너무 많은 과거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드라마에서 갈등과 상처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봉합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닙니다.
결국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어딘가에 쪼그리고 앉아있어요.
못생기고 지질한 데다 뚱뚱하고 이기적인. 분란을 일으키네, 트러블메이커네 하는 말을 너무 자주 듣고 자랐던 은따소녀는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과거를 덮고 잊고 도망치려 할수록 늪에 빠지듯 빨려 들어갑니다.
이렇게 자꾸 붙잡아 대서 오롯이 현재를 보는 것이 여전히 어렵고 힘겨워요.
긍정확언, 마음 챙김. 필사.
대체 뭐가 바뀐다는 건지, 급속히 우울해졌어요. 힘이 빠지며 필사하던 연필이 손에서 빠져서 도르르 굴러갔습니다.
한참을 우울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어요.
한 달 가지고 뭘 하겠다고. 하하하
처음 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자존감을 높인다고 실행해 보라 하는 각종 책들로부터 받은 여러 방법들이 있었고, 몇 년간 따라서 해봤어요. 분위기 좋은 곳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는다거나, 혼자 먹을 때도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예쁜 접시에 먹는다거나 하는 걸 비롯해 아주 많은 것들을요. 하지만 결국 나를 존중하는, 나를 위한 '방법'이 아닌 '강박'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냄비 째 컴퓨터 앞으로 가져와 라면 뚜껑을 접시 삼아 먹지 못해요...)
시무룩해져서 의자에 파묻혔어요.
우울이와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 눈물도 닦아내지 않았어요.
그러다 새삼 생각이 났어요. 왜 필사를 하게 됐었는지.
친구에게 내가 먼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생일 즈음에 치즈케이크와 와인을 먹자고 약속을 해서였어요.
그날을 위해 할 일이 있었어요.
B를 만나는 날 케이크를 사가지고 가기 위해 진한 치즈케이크를 파는 곳도 사전에 찾아놔야 하고,
같이 먹을 사치스러운 와인도 미리 골라서 사놓고 그날 들고 가야 하죠.
(게다가 약속했던 와인 품종이 아주 다양하지는 않아서 사는데 여러 날을 써야 할지 몰라요)
약속을 지키려고 시작했던 거였는데...
의식도 못하고 있던 걸 언제 하려고 계획했었던 양 구는 건지. 확언이 믿기지도 않고 동감도 되지 않으니 이중 공감이 가는 내용만 필사하겠다고 했으면서 왜 바라지도 않던 것에 대해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이러고 있을까.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애당초 상관이 없지 않았나.
순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어요.
눈물이 멈추는 걸 보니 우울이도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하루 한 장, 이라는 책 제목처럼
하루를 버티기 위해 쓰면 되겠지.
한 장을 쓰기 위해 버티면 되겠지.
그걸로 오늘은-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