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시간을 달려서, 권은주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달릴거에요
21년간 여자부 마라톤 한국 기록은 권은주의 것이었다. 1997년 21살의 권은주는 2시간 26분 12초로 춘천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 해, 세계 랭킹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정점이었던 시기가 지나갔지만 권은주는 여전히 달린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계속 달리겠다는 목표를 지닌 채. 그에게 나이듦이란 어떤 존재일까. 두렵지만 내일을 기대한다는 그를 만나봤다.
[Anti-anti aging] 시간을 달려서, 권은주(EDITOR 차영우 DESIGNER 최정현)
PHOTOGRPHY 권혜린 HAIR&MAKE-UP 채현석
-여자 마라톤 한국 기록이 2018년이 되어서야 깨졌죠. 이렇게 오랫동안 기록이 멈춰 있으리라고 예상하셨어요?
전혀 생각 못했죠.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어요.
-21살에 한국에서 그 분야의 1위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저는 김연아, 박태환 선수를 보며 어렴풋하게 상상만 해봤거든요.
한국 기록을 경신하고도 스스로를 의심했어요. 이게 내 실력인가? 당시 기자 분들이 저를 올림픽 메달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신데렐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시선들이 부끄럽고 민망했어요. 내가 잘 뛰었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내가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세계 랭킹 7위에 올랐어요. 1998년 보스턴 마라톤 초청도 받았죠.
저는 학생 때 전국 5위권이었어요. 그래서 한국 기록을 경신한 게 실력이 아니라 운이라고 남들이 생각하는 것 같았죠.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싶어서 휴식도 없이 훈련을 강행했고 부상을 당했어요. 기록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항상 같은 대답이었어요. 내 기록은 반드시 내가 다시 깬다. 내가 나의 라이벌이었죠.
-부상 때문에 1998년에 개최된 보스턴 마라톤, 방콕 아시안게임 출전이 모두 불발됐어요.
부상을 입기 전에는 한국 기록을 경신하고도 체력이 남아서 기록을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출전을 못해서 아쉬웠죠. 게다가 저랑 비슷하게 26분대 기록이었던 다카하시 나오코가 방콕에서 21분대(2시간 21분 43초)로 금메달을 땄어요. 저도 가능할 것 같았어요. 항상 기록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내 기록은 내가 다시 깬다고 대답했는데 결국 못 깨고 은퇴했죠.
-김도연 선수가 2018년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웠어요.
은퇴 후에 스스로 한국 마라톤 기록 보유자라고 소개했거든요. 타이틀이 좋잖아요. 기록이 깨지면 나를 어떻게 소개하지? 이런 고민을 가끔 했어요. 그런데 막상 기록이 깨지니까 속이 후련했어요. 기록 말고도 저를 소개할 수 있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괜히 조바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가지고 있던 마라톤 기록이 깨질 때 현장에 계셨어요?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은 러닝크루, 아식스 러닝클럽 분들을 응원하러 매년 갔어요. 기록이 딱 깨지니까 같이 응원나왔던 당시 아식스 사장님이 사라지셨어요. 편의점에 가서 소주를 사오시더니 한 잔 따라서 제게 주셨어요. “감독님, 기록 깨진 거 축하합니다.”
-남들은 커리어를 쌓을 시기에 은퇴를 하셨잖아요. 갑자기 사회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은퇴를 해도 삶은 계속 이어지는데 준비 많이 하셨어요?
선수 생활이 길어지니까 사회로 나갈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어요. 몸이 안 좋아져서 자연스럽게 은퇴를 했는데 너무 막막했어요. 달리기 말고는 아는 것도 없는데 자리 잡힌 게 없었죠. 그래서 너무 무섭고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래도 후배를 양성하고 싶어서 교육대학원을 갔어요.
-은퇴를 하고 나서도 계속 마라톤도 출전하고 트레일 러닝도 하시잖아요. 할머니가 되어서도 달리겠다는 목표도 있으시고요.
선수 때는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컸죠. 달리기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경정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은퇴를 하니까 처음처럼 달리는 게 마냥 좋았어요.
-몸이 안 좋아져서 은퇴를 하신 만큼 점점 몸이 선수 때와 달라지잖아요.
은퇴한 직후에는 10km 대회 나가면 힘들이지 않고도 기록이 잘 나오니까 몸이 변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마흔살이 넘어가니까 체력이 떨어지는게 느껴졌어요. 그때는 진짜 속상했어요.
-지금은 몸 상태에 적응을 하셨어요?
속상해도 어쩔 수 없죠. 선수 때만큼 몸이 좋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죠. 그 과정이 정말 어려웠어요. 재활을 할 때만큼 힘들었거든요. 빨리 회복하고 싶어서 조급함이 온몸에 가득할 때 같았어요.
-선수 때는 좋은 몸의 기준이 절대적이잖아요. 속도. 마흔이 넘으면서 체감할 정도로 몸이 떨어지고 있는데, 지금은 좋은 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자연스럽게 변하도록 놔두되 근육이 빠지지 않도록 운동을 하는 댐 같은 몸이요. 요즘 바디프로필 촬영이 유행하면서 몸을 혹사시키며 감량을 하는 분들을 봐요. 저는 러닝이든 감량이든 평생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하면 오히려 병이 나죠. 제가 저를 증명하려다가 아팠던 것처럼요.
-러너의 고민은 자외선이죠. 햇볕 아래서 몇 시간씩 뛰니까요. 감독님은 햇볕에 피부가 그을리는 것도 자연스럽게 두시나요? 탄탄한 몸, 구릿빛 피부의 할머니 러너가 될 수 있게요.
달리기 전에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히 바르긴 해요. 수정 화장은 안 하는데 요즘은 몸의 탄력은 줄고 피부가 까매지기만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여요. 선수 때 더 신경 썼어야 하나 싶기도 하죠.
-실업팀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에는 팀에 외모 관련 규정이 있었나요?
실업 3년차까지는 모든 종목 선수들이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어요. 그게 실업팀 ‘국룰’이었죠. 성인이 되었는데 머리도 못 길렀어요. 지금 생각하면 안 당연한데,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죠.
-그럼 3년차 이후에는 머리를 기르기도 하셨어요?
스물 다섯살 때 머리를 기르고 염색도 한 번 했어요. 그리고 운동을 갔는데 감독님이 저를 불렀어요. “너 벌써 머리를 그렇게 하면 다른 팀 감독들이 운동 제대로 안 한다고 흉봐. 머리 당장 제대로 하고 와.” 그럼 진짜 미용실 가서 머리를 다시 검은색으로 바꿨어요. 지금 생각하면 절대 벌어질 수 없었던 일이었던 거지. 하지만 그때는 감독님이 시키면 다 해야하는 줄 알았어요.
-그럼 꾸미는 일에는 일절 관심이 없으셨나요?
관심조차 없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외모를 꾸미는 데 매우 보수적인 집단에 속해있었잖아요. 머리카락도 못 길렀고요. 게다가 휴식일이 고작 일주일에 하루 있었어요. 힘든데 나를 꾸미는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꾸미는 걸 몰랐고, 하는 방법도 몰랐죠.
-(정현)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최근에 영우님을 따라서 처음 뛰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화가 나는 거에요. 나는 막 죽을 것 같고 집도 회사에서 먼데, 왜 이렇게 힘들게 시키지? 그런데 그 날, 집에 가서 우울증 약을 먹지 않고 바로 잤어요. 감독님도 우울할 때 달리시나요?
비슷해요. 저도 이제 아식스에서 퇴사하고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이 많아요. 선배들이 “너는 그렇게 뛰고도 안 질려?”라고 물어요. 저는 안 달리면 못 견디는 것 같아요. 달리는 동안에는 호흡과 내가 뛰어야하는 길에만 집중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처한 답답한 상황을 잊어 먹죠. 저를 포함해서 누구나 우울증을 겪는 것 같아요. 단지 모르다가 다시 뛰면서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뛰면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맑아지니까요.
-(정현) 감독님도 우울증이라고 느껴보신 적이 있어요?
선수 때 부상을 당했는데 그때 우울증이었던 것 같아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동료들이랑 한 마디도 하기 싫거든요. 어느 날 후배가 “언니 괜찮아질 거에요”라고 편지를 써서 줬어요. 걱정할 만큼 힘들어 보였나봐요. 그때, 우울증이었던 건 아닐까? 그 자체를 모르던 시대였죠.
-(정현) 부상을 입으셨을 때 어떤 점이 제일 힘드셨어요?
선수들은 몸이 아프면 죄인같아요.
-(정현) 처음 뛰고 집에 갔는데 걱정할 시간이 없는 거에요. 그냥 바로 잠들었어요.
달리기라는 돌파구가 있는 건 좋은 것 같아요. 내성적인 분들도 뛰러 나오시면 새로 만난 분들이랑 같이 달려요. 그냥 달리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대단하죠.
-(정현) 저도 달리니까 영우님이 칭찬을 많이 해주는 거에요. 제가 뭐라도 된 것 같고 그랬어요.
달리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엄청나죠. 같이 한 번 뛰실래요?
-(정현) 아, 감독님이 오신다고 하면 뛰어야죠. 하기 싫을 수도 있지만.
저도 요즘은 뛰기 싫은 날은 쉬어요. 꼭 안 해도 되잖아요.
(본문 중 인터뷰어의 코멘트는 개인의 생각일 뿐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뷰티 스타트업 '디밀'은 "고객의 아름다움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비전에 맞춰, 코스메틱 커머스에 이어 '라이프스타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표현으로 옮겨낸 디밀의 첫 번째 오리지널 콘텐츠 캠페인은 'Good aging(Anti anti aging)'입니다.
차영우 에디터가 지금의 시간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행복한 세 분의 인터뷰이를 만났습니다. 전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 권은주 감독님, 65세에 커리어를 시작한 배우 이향란님, 그리고 '우리 세대의 나이듦'을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 우야다님 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나이가 드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고, 오히려 내일을 기대하는 시니어의 삶에 대해 말씀 주셨어요. 앞으로 저희와 함께 뷰티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실까요?
두 번째 인터뷰는 '배우 문소리의 엄마'를 넘어 60대에 새 커리어를 열은 시니어 모델 이향란님과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