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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태준 Dec 14. 2021

커리어를 65살에 시작해도 두렵지 않은 이유

'배우 문소리의 엄마'를 넘어 '시니어 모델 이향란'으로 

향수는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뿌리자마자 퍼지는 탑 노트, 머무르는 미들 노트, 흔적을 남기는 베이스 노트다. 향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흘러야만 한다. 뿌리자마자 잔향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향란도 “온갖 노릇과 도리*”를 마친 뒤에야 자기의 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게 나이듦이란 어떤 존재일까. '배우 문소리의 엄마'를 넘어 60대에 새 커리어를 열은 시니어 모델 이향란을 만나봤다.


[Anti-anti aging] 이향란이라는 향 (EDITOR 차영우 DESIGNER 최정현)

-가족을 이루면 이름부터 없어지는 것 같아요. 특히 아이가 생기면 이제 누구 엄마가 되잖아요. 할머니가 되어서야 다시 이향란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한자로 향기로울 ‘향’, 난초 ‘난’을 써요. 여자 아이니까 향기로운 난초처럼 잘 자라라는 의미로 지어주시지 않았나. 근데 학생 때는 친구들이 향단이라고 놀려서 싫었는데 요즘은 또 괜찮아요.


-저는 1930년대 유명한 배우였던 리샹란(이향란)이 떠올랐거든요. 저는 1년 전에 갑자기 이름을 바꿔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 제 이름에 애착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살아보니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게 참 어려워요. 그런데 저는 이름부터 다른 사람에게 좋은 향기를 건네줄 수있잖아요. 좋더라고요. 영어 이름도 그래서 향란과 비슷하게 헬렌으로 지었어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도@helen_hyangran이에요. 나이가 드니까 부족한 것도 많지만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게 되었어요. 앞으로 우아해지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우아해진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특히 우아하게 죽고 싶어요. 우리는 누구나 죽는데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꺼려요. 그런데 제가 어르신들을 돌보다 보니 죽음에 대해 기준이 생기더라고요.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정했어요. 이 기준을 지키면서 우아하고 멋있게 가고 싶어요.


-제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본인의 장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이런 것은 미리정해야 한다면서요. 우아하고 멋진 죽음이라. 다양한 모습이 있을 것 같은데요.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 것은 싫어요. 아프더라도 가족들, 친구들하고 작별 인사를 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어요. 그리고 알츠하이머 병을 예방하려고 노력해요. 영어 공부처럼 기억력이나 집중력을 키워줄 수 있는 활동을 시작했어요.


-영어 공부가 도움이 많이 되나요?

영어 공부를 시작한 건 3~4년 전에 외국 명상 지도자 분과 대화하는 일흔이 넘은 소설가 분을 본 뒤에요. 그때 공부를 시작하면 나도 일흔쯤 생활 영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시작은 했는데, 만만치가 않아요. 평생 해야해요. 근데 영어 공부를 하면서 생각지 않게 대본을 잘 외우게 됐어요.


-확실히 기억력이 좋아지나요?

사실 시니어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싶어도 대본을 못 외워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직 저는 50대, 60대 배우들이랑 함께 연기 수업을 들어도 대본을 외우는데 지장이 없어요. 손자들에게 공부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대화도 할 수 있어서 좋죠. 결정적으로 재밌어요.

-재미있는 일들 중에는 연기도 있겠죠. 오디션 많이 보러 다니세요?

많이 봐요. 지금 제가 참가하는 오디션은 전부 단편 영화에요. 주로 대학생들 졸업 작품들이죠. 오디션 때문에 처음 홍익대학교도 갔어요. 나이 들면서 길눈도 어두워지고 지하철 타기도 어려워서 집에만 있었는데, 오디션을 봐야 하니까 대중교통을 타고 대학교들을 찾아가요.


-주로 집에 계시다가 대중교통을 타고 대학교에 다니는 게 어렵지는 않으세요?

이제 모르면 막 물어봐. 지도를 봐도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나가는 학생들 붙잡고 물어봐요. 그 친구들도 잘 몰라요. 아, 대학생들도 방법을 잘 모르는구나. 내가 지도를 못 보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구나.


-맞아요. 지도 앱을 보면서 길 찾는 것도 쉽지 않아요. 젊다고 모두 앱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니고요. 오디션을 많이 보시면 떨어지는 일도 많죠?

길을 물어물어 대학교에 찾아가서 오디션을 봐요. 처음 서너번 보고 떨어졌어. 그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 말 안하고 몰래 갔어요. 그러니까 누가 “탈락이 일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이미지가 안 맞는다고 생각해야지. 자신감 잃지 마시고 숨기지 마시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젠 말하고 오디션 가서 떨어져요. 씩씩하게. 또 떨어졌네?


-저도 공모전 탈락을 참 많이 했어요. 계속 탈락하니까 마음이 안 좋고 자신감도 떨어지고 결국 소설을 쓰는일이 싫어지더라고요.

그것도 극복해야 되니까요. 배우는 일상이 오디션이잖아. 좀 유명한 배우들도 오디션 보러 가서 떨어져요. 그러니까 나도 당연히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연기 배우고 오디션 다니는 게 재밌어요.

-MBC 예능 프로그램인 “전지적 참견 시점”의 문소리 배우 편에 나오셔서 시나리오 관련해서 질문도 하셨잖아요. 따님이 배우인데 연기를 하는 게 부담되지는 않으신가요?

딸이 “모델 한다더만 무슨 연기를 하시느냐”라고 타박도 해요. 현장에서 저같은 단역이 얼마나 고된지 알잖아요. 한 번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땅 파는 씬도 있고 힘든 역인데 왜 하시냐”라고 그래. 나는 이 배역도 지금 캐스팅이 될 지, 안 될 지 모르잖아요.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닌데. 연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나를 찾을 수 있어서 재밌어요. 게다가 힐링도 되요.


-연기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힐링’은 좀 의아해요.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삶을 들여다 보니까 행동 하나하나 이해가 가요.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져서 타인과의 관계, 소통이 원활해졌어요. 이런 것들이 저에겐 힐링이 되었어요.


-(정현) 배우님 이야기를 듣고 저도 엄마 앞에서 디자인 하는 상상을 해봤거든요? 너무 쑥스러워요. 칭찬 들으면 본전이잖아요. 저는 배우님 입장이라면 딸(문소리 배우)과 사위(장준환 감독) 앞에서 도전하는 모습을 못보여줄 것 같거든요.

(전지적 참견 시점)촬영할 때, 시나리오를 물어보러 장준환 감독에게 갔거든요. 근데 딸에게 타박을 듣고, (네가) 교수니까 연기 좀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모녀 간에 그러면 사이가 안 좋아진다”하고 대답하더라고요. 옳지. 나도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았거든. 가족 간에는 운전도 배우는 게 아니잖아. 돈을 내고 남에게 배우는 게 맞지. 나이드니 얼굴이 두꺼워진달까. 여유가 생겨요.


-예전 같았으면 그런 상황이 조마조마했을까요?

자기 엄마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배짱이 여유가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 키울 때는 잘 해도 걱정, 못해도 걱정이지. 이제는 자식들이랑 손자들이 잘 컷 다행히 걱정이 없어요. 걱정해도 바뀌는 게 없잖아요. 순리대로 따라가는 게 맞죠. 나는 이제 내일이 없어요. 살림도 늘려봐야 짐이지. 사람답게 살고 즐기다가 언제라도 갈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요.


-그런 배짱이 모델 아카데미 등록이나 연기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나? 이 나이에? 고민하니까 지인이 최순화 선생님 이야기를 해줬어요. 수업 참관을 갔더니 나쁘지 않겠더라고. 내가 싱크대 앞에서 일을 많이 해서, 목이랑 어깨가 앞으로 굽었어요. 앞으로 더 구부러질텐데 모델 수업을 들으니까 자세도 펴지면서 좋겠더라고요.

-한국 일보 인터뷰를 보면 일을 하면서 울퉁불퉁한 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사진을 찍었을 때 손이 더 여리여리하게 예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도 내 손이니까 개의치는 않는데, 모델이니까 더 예쁘게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죠.


-하지만 그 손으로 가장의 역할을 해내셨잖아요. 그것도 훌륭하게.

젊어서는 나에게 집중할 시간이 없었죠. 원래 사진 찍히는 것도 안 좋아했어요. 이제는 모델 일을 하면서 거울 앞에서 스타일링도 해보고 표정 연습도 하면서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죠. 거울 앞에 앉아 있으면 남편이 슥 보고 웃어. 그럼 내가 비웃지 말라고 쏘아붙여요. 그럼 “비웃는 거 아냐” 그러대.


-흐뭇해 하시는거죠? 인터뷰에 앞서 듣다보니까 자랑도 많이 하시는 것 같던데요.

밖에 나가서 내 자랑을 하는데, 나는 그럼 푼수 소리 듣는다고 하지 말라고 해요. 그래도 괜찮대. 지금 내 모습이 남편이 보기에도 좋대요. 지금이 내 인생에서 화양연화고 황금기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밝은 시기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일을 하니까 즐겁죠. 지금도 1순위는 손자들, 자식들이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니까 나한테 집중할 수 있잖아요.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찾았어요. 그 전까지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잖아요. 그 기회 자체가 좋고, 행복해요.


-나이를 먹을 수록 해야하는 도리와 노릇이 늘잖아요. 결혼을 하면 며느리 노릇, 아이가 생기면 어머니 노릇을 해야하죠. 수많은 역할을 해오셨는데 이제 배우로서 하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캐스팅이 되면 무엇이든지 해야죠. 저는 배우란 도화지처럼 하얘서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무엇이든지 담아낼 수 있어야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 색깔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폐지 줍는 할머니, 이웃집 할머니 역할을 주로 하는데, 지금 맡는 역할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인상 깊었던 캐릭터는 있으셨나요?

딸에게 추천을 받아서 <노매드랜드>(2020)을 봤어요. 동네엔 상영관이 없어서 멀리 아트관에 가서 봤죠. 숏커트를 한 여자가 주인공인데 처음에는 남자인 줄 알았어. 혼자 캠핑카를 타고 돌아다녀요. 그러다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 발가벗고 드러누워요. 자유로워보여요. 그걸 드론으로 위에서 찍었는데 누드라서 털이 보일 정도였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씬이 눈에 선해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감을 주고, 누드도 아름다울 수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어요. 저도 그렇게 자유가 느껴지는, 영감을 주는 장면을 찍어보고 싶어요.


-오히려 누구보다 활달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오히려 찬 밥, 더운 밥 가리지 않고 어떤 배역이라도해야한다고 말씀하셨고, 앞으로 맡을 배역들이 모두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시잖아요. 누구보다 젊은것 같아요.

아카데미 동기들 중 친한 친구들은 모두 50대에요. 그 친구들한테 이야기해요. 나는 시간이 얼마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시간이 많지 않냐.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라. 그러면 윤여정 선생님처럼 오스카 상을 탈 지 누가 아느냐. 요즘 예수정 선생님 보면서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이 들어가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이 멋있잖아요. 하지만 연기가 정말 만만치 않아요.


-무엇이든지 진지하게 할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모든 일에 최소한 10년은 흘러야 전문가가 된다던지, 인정을 받는다던지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여든이 되면 자신있게 작품을 하나, 임팩트 있는 장면이나 작품을 하나 남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늘 촬영은 2013년 문소리 배우가 “GQ 코리아”와 인터뷰했던 ‘먹는 소리’의 컷들을 레퍼런스로 보여드렸어요. 촬영이 재미있으셨으면 좋겠어요.

나한테는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어요. 딸하고 시간대는 틀리지만 비슷한 콘셉트로 촬영을 했잖아요.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삶의 흔적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생화에서 향기가 나서 좋았고.


-조화와 함께 생화를 준비하기를 잘했네요.

촬영 내내 향기가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김애란 ,「서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3, p.292)

EDITOR 차영우 PHOTOGRAPHY 권혜린 

HAIR&MAKE-UP 채현석 DESIGNER 최정현

(본문 중 인터뷰어의 코멘트는 개인의 생각일 뿐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뷰티 스타트업 '디밀'은 "고객의 아름다움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비전에 맞춰, 코스메틱 커머스에 이어 '라이프스타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표현으로 옮겨낸 디밀의 첫 번째 오리지널 콘텐츠 캠페인은 'Good aging(Anti anti aging)'입니다.

차영우 에디터가 지금의 시간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행복한 세 분의 인터뷰이를 만났습니다. 전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 권은주 감독님, 65세에 커리어를 시작한 배우 이향란님, 그리고 '우리 세대의 나이듦'을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 우야다님 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나이가 드는 것이 하나도 무섭지 않고, 오히려 내일을 기대하는 시니어의 삶에 대해 말씀 주셨어요. 앞으로 저희와 함께 뷰티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실까요? 


세 번째 인터뷰는 유쾌하고 개성이 넘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우야다 스튜디오'와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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