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구해줘

by 헤일리 데일리

넷플릭스를 오랜만에 켰다. 여담이지만 연간 구독을 해도 거의 넷플릭스를 이용하지 않는 나다. 그냥 마음이 가질 않는다. 남들이 재밌다고 하는 콘텐츠도 그다지 관심이 없고, 뭐를 봐도 조금 보다가 금방 감흥이 없어진다. 그 유명한 '연진이'라는 캐릭터 나오는 그 드라마도 안 봤다고 하면 사람들이 크게 놀라곤 한다.


그래도 올해는 넷플릭스를 꽤 이용한 편이다! 지난달에 <애마>를 정주행 했고, <웬즈데이>는 중간에 보다 말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소름이 돋는 포인트가 있다. 지난달에 완독 한 책 권수가 올해 중 가장 낮은 기록 차지했다는 것이다. 즉, 영상 콘텐츠 시청 시간이 독서 시간과 반비례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이 통계의 표본은 나 하나다.


출처: 넷플릭스


최근 발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중과 상연>을 봤다. 엄밀히 말해서 아직 1~3화만 본 상태다.


두 여자의 우정이자 질투, 가깝고 싶지만 가까울 수 없는 그런 미묘함을 다룬 작품이다.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미래를 위해 알아두어야 하는 지점도 있었다. 여학생들의 교우 관계는 상당히 복잡, 미묘하고 이해 불가인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유리알 같아서 깨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그래서 때로는 굉장히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뤄야 할 때도 있다.


나도 그런 터널을 지나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복잡하게 살았나 싶다. 그냥 쿨하게 친구들을 대해도 됐을 것을 말이다. 어차피 남을 인연은 남고, 떠날 인연은 떠날 테니. 아마 여자 사람들 간 이런 생리를 남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리 남편이 딸의 교우관계에 의아해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봤자 어린이집이지만 말이다.


출처: 넷플릭스


선망과 원망 사이. 어쩜 이 한 줄로 그 관계의 특성을 간결하게 잘 살릴 수 있었을까. 너무 공감이 가는 문구였다. 그동안 인연이 닿았던 친구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아이들도 있다. 잘 살고 있겠지? 그렇다면 고마울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정주행 하지 못하고 멈춰 선 이유는 따로 있다. 극 중 상연의 오빠 '상학'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스토리 전개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도저히 이어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건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인 듯하다. 최근 해당 작가의 작품인 <상실의 시대 - 원제: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젊은이들의 허무한 상실을 간접 경험 했었다. 특별한 시발점도, 이유도 없는 우울과 죽음을 엿보며 나도 알게 모르게 상실감을 겪었나 보다. 이 소설이 발표되고 일본 젊은이들의 자살이 크게 늘었었다던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부디 그대 나를 잡아줘.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제발. 이 거친 파도가 날
집어삼키지 않게.



에피톤 프로젝트의 심규선 님이 부른 <부디>라는 곡의 가사다. 하루키의 소설을 덮고 우연히 라디오를 틀었는데 이 노래가 나왔다. 소설 속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청춘들의 목소리 같아서 눈물이 나왔다. 부디 내 손을 잡아달라는 외침. 그들은 구원의 손길을 바랐을까? 소설 속 나오코는 주인공 와타나베에게 많은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녀 역시 전 남자친구, 친언니와 같은 선택을 했지만 말이다.


다시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으로 돌아와서 상학의 죽음을 살펴보면, 아직 그 선택의 이유는 모르겠다. 뒤편에서도 그 이유를 자세히 다뤄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단서는 상학의 일기장이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곧 너에게로 갈게.



이미 결정을 내리고 삶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은 문장이었다. 과연 상학은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었을까?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혼자 마음 고생하고 중대한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이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이유다.




<부디>라는 노래에는 웃긴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심규선 님의 맑은 음색에 놀랐다. 그런데 그 청아한 목소리에서 애절하고도 간절하게 구원을 바라는 가삿말이 나오니 듣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잡게 했다. 당시 나는 이 노래를 동아리방에서 처음 접했었다. 가사가 하도 절절해서 이 노래를 틀은 선배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배, 이거 CCM이에요?"


무교라서 종교가 없던 나는 이런 무식한 질문을 해버렸다. 그 정도로 나는 이 노래가 너무 간절하게 들렸다. '나를 구해줘'라는 절규의 외침으로 말이다.




삶에서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상실. 그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인 것 같다. 누구는 직시하며. 누구는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겠지. 아마도 상실감을 이토록 삶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다.


어쩌면 '살아낸다'는 말이 우리 인생에 꼭 알맞지는 않을까? 삶의 일부인 죽음, 거기서 오는 상실을 마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실감을 극복해 나가면 좋겠다. 부디 우리 사회의 청춘들도 이 점을 알아주길 바란다.

keyword
금요일 연재